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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하문명과 고조선 역사의 문명사적 고찰(考察)

작성자
방석종
작성일
2007.02.14
첨부파일0
조회수
2241
내용

요하문명과 고조선 역사의 문명사적 고찰(考察)

 

-단군사화(史話) 본문의 역사비평적 해석-

 

방석종(方錫淙)

前 감리교 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목 차

 

I. 서설

 

II. 문제제기와 방법론

 

1. 어의론적 분석: 석유(昔有), 서자(庶子), 삼위(三危),

환웅천왕(桓雄天王),단군왕검(檀君王儉)의 王 칭호,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 환인의 품성과 행위

2. 석유환인-삼위태백-홍익인간의 구문적 분석

3. 대홍수 재난 문학의 평행(Parallel)

4. 양식사적 비평과 삶의 자리

5. 결과

 

III. 단군설화 본문의 문화사적인 고찰

 

고조선의 홍산문화(紅山文化)와 중국의 앙소/용산문화

1. 곰과 호랑이 토템과 앙소문화

2. 웅녀의 결혼과 용산문화

 

IV. 고조선의 영토사적인 고찰

 

1. 고조선 영토전승의 문제

2. 요하문명 대(對) 황하문명의 역사적인 관계

3. 단군왕조 전통의 문제

4. 환인 상제신과 하은주의 천사상(天思想)

 

V. 종합적 고찰(綜合的 考察)

 

 

I. 서설

 

필자는 단군설화(사화) 연구를 위해 일차적으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史)에 실려 있는 고조선(古朝鮮) 역사 본문을 가지고 그의 시대와 문명을 폭넓게 보고 단군사화 본문을 개별적으로 주석하려고 한다. 문화사적으로 단군사화는 그의 연대 기원전 2333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사시대(先史時代)또는 원시시대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단군사화는 이런 시대적인 배경과 연결되어 본문(本文)이 주석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단군사화는 그의 역사적인 자료와 증거물이 충분치 못한 가운데 몇몇 사서(史書)의 인용(위서, 고기, 당배구전, 통전 등)으로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역사서는 후대의 편찬 된 내용들이라, 단군사화 본문의 내용과는 거리가 멀리 있는 후대의 창작물이라는 의심도 받는다. 특히 역사적으로는 전설시대(傳說時代)라는 틀에서 기록을 보아야하기 때문에 환인 상제신 옆에, 환웅(桓雄)과 웅녀(熊女)라는 인물은 역사적으로 말하기는 불가하지만, 수렵과 농경사회, 씨족사회의 형성은 신석기(新石器) 시대와 청동기 시대로 이행되었던 인류문명의 발전단계와 원시국가(原始國家) 성립과정을 반영(反映) 하고 있다.

일찍이 중국은 전설시대의 하왕조(기원전 2050-1550년 추정)나 상왕조(기원전 1800-1100년 추정)를 상서,시경, 죽서기년, 사기 등에 기록해 놓았다. 이런 전설시대는 중원과 황하를 중심했던 선사시대의 앙소문화(기원전 5000-3000년 또는 5000-2500년)와 용산문화(기원전 2800-2000년 또는 2300년-1800년 추정)를 근거로 했던 시대로 정리해 놓았다. 중국의 하은상(夏殷商)나라는 공통적으로 용산문화(龍山文化) 이후(以後)에 등장하였다.

그렇다면 단군왕조는 중국의 용산문화 기간에 건국되었던 국가이었다. 그는 중국의 고대 전설국가 보다 근 300년 먼저 세워졌던 역사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고조선은 문명사적으로 홍산문화(紅山文化,기원전 4000년-2000년)라는 독립된 문화를 발전시켰다. 우하량 문화(기원전 3500년 추정)도 발견되었다. 고조선 성립은 하가점 하층문화(기원전 2500년-1500년) 기간이었다. 고조선 문화는 현재까지 주로 고고학적인 출토물들 예를 들면, 고조선 복식, 채색 질그릇(적,백,황,흑색),비파형 동검, 세형동검과 석곽묘, 고인돌 등의 높은 수준의 예술 조형물 연구에 집중되어 있을 뿐이요, 그의 시대적인 상황이나 정치적인 현상이 중국의 역사기록물만큼 준비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단군사화 본문에 나타난 정치사회상들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고조선의 홍산문화 틀 속에 우하량(牛河梁)의 여신(女神) 종교와 하가점 하층문화(또는 豊下文化) 기간의 고조선 건국을 받아드리면서도, 중국의 앙소문화와 용산문화에 나타난 원시사회 성립과 발전과정들을 전제로해서 단군사화의 본문을 주석할 것이다.

 

 

II. 문제제기와 방법론(問題提起와 方法論)

 

중국 앙소와 용산 양 원시-선사문화와 독립적으로 비슷한 시대에 난하/대릉하와 요하 유역을 중심해서 발전 되었던 홍산문화 틀 속에 우하량 문화(기원전 3500년경)와 하가점 하층 문화 (기원전 2500-1500년)는 단군 고조선 국가를 형성케 했다(기원전 2333년경). 시대적으로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요(堯)임금과 동시대적이었다. 이것은 위서(魏書)의 내용이다.

그런데 고기(古記)에는 그보다 더 오래된 환웅시대를 ㅁ석유 昔有 옛날ㅁ에라는 설화문 도입구로 시작하고 있다. 이런 문구는 계속해서 서자환웅 수의천하(數意千下) 탐구인세 하시삼위태백(貪求人世 下視三危太伯) 가이홍익인간(可以弘益人間)이라는 4자 또는 6자 성어(成語)로 서술되고 있다.

문제는 옛날은 어느 때 어떤 시기였는가? 삼위태백은 위치가 어디였는가? 환웅이 인간을 위해서 홍익인간을 갈망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상황에서 환웅은 인간을 위해 지대가 높은 산들을 찾았는가? 환인(桓因)과 환웅(桓雄)은 부자관계이지만, 그들의 역할과 존재위치는 어떻게 구별 되는가? 그 다음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이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에서 곰과 범의 토템동물은 원시사회-선사시대에서 어느 문화에 속한 것인가? 이들이 동물에서 인간화를 원하는 과정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그리고 熊女者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여자가 된 곰은 더불어 혼인할 자가 없으므로 매번 단수 아래에서 잉태케 해달라고 빌었다)에서 여인의 적극적인 결혼의지와 모권적(母權的)인 분위기를 감지케 하는 것은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환웅은 잠시[사람으로]변하여 그와 혼인하니)로 이어지면서 모계가 부계(父系)로 옮겨지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토템종교 사회에서 인간중심으로 발전되는 과정 그리고 여인 중심의 모권적인 사회가 얼마 동안 지속되다가 부권사회로 옮겨져 일부일처제의 가정을 형성하는 배경을 말하고 있다. 특히 웅녀와 환웅의 결혼과 단군왕검의 탄생은 천손계(天孫系)의 왕조(王朝)를 천명하는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일련의 원시-선사시대의 발전과정은 어떤 문화사적인 배경에서 형성되었으며, 그런 선사시대를 어떻게 추적해 낼 수 있을까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여기에 단군설화 본문 해석의 방법론적인 기술이 요청된다. 첫째로 어의분석(Semantische Analyse)이고, 둘째로 문학적-전승사적(傳承史的)인 비평방법이요, 마지막으로 동기와 전통비평(動機와 傳統批評)이다. 이런 방법론을 적용하여 위에 언급된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1. 어의론적 분석(semantische Analyse,語意論的 分析)

 

필자는 위에서 단군설화의 시대적인 배경을 문제 삼고, 설화본문을 역사적-문화사적인 맥락으로 거슬러 올라가 가장 가깝게 일치하는 의미를 모색하는 해석 작업을 제안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단군설화 본문을 역사적-문학적 또는 문자적으로 해석한 연구서를 많이 접했고, 계속해서 접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반 한문(漢文)의 사전적인 어의(語意)와 색인사전의 용례(用例)로 만족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군설화 본문에서 특이한 어문적-어휘적인 조형(造形)을 본다. 이를테면, 석유, 서자, 삼위태백, 환웅천왕, 단군왕검 등인데, 이들은 일반 부사용법, 일반명사(석유, 서자)로만 이해하기에는 간단하지 않은 것 같다. 고유지명(삼위태백)은 하나의 지명인지, 두 개의 지명의 결합인지 지리상의 사실로는 낯선 것이다. 그리고 고대 또는 선사시대의 배경에서 환웅천왕과 단군왕검은 통치자의 칭호로서 “왕(王 )을 가지고 있다. 인류는 어느 시대부터 왕(王 ) 칭호를 사용했던 것인가? 이런 어휘들의 어의는 지금까지 별로 크게 문제되지 않고 그냥 포괄적인(총론적인) 의미로 넘겨져 왔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 구문상의 단어들이 특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있다면, 그들은 해석 작업에서 어휘(단어)의 의미 분광(독일어로 Das Bedeutungsspektrum), 즉 단군설화 본문의 동시대 상황과 작품들을 신중하게 끌어들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어휘에 대해서 동시대적(同(共)時代的,synchrone Betrachtung)인 고찰이 요청된다. 그러나 우리는 단군설화가 문서로 작성 된 이후 전승(傳承) 단계에서 다양한 여러시대의 손을 거친 것은 아닌가 의심하면서 연대기적인 고찰(diachrone Betrachtung)에 머물러 단군설화 본문의 시초 또는 그 설화의 직접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있지 않은가를 성찰(省察)할 필요가 있겠다. 단군설화 본문의 어휘들이 사실상 확정된 또는 임시적인 의미의 지식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어의적인 분석은 아직도 본문의 내용의 구명(究明)을 전할 수 없다. 어의분석은 그 결과가 온전히 나올 때까지 반복해서 검토되고, 재검사로써 증명되고, 교정되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부정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다의적(多意的)인 어휘 가운데서 적합한 의미를 찾아보려고 의미분광(Das Bedeutungsspektrum, 意味分光) 방법을 사용한다.

 

단군설화 고기(古記) 첫머리는 석유환인으로 시작한다. "옛날에 환인...구하였다"에서 昔에 대해서 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어 한문(漢文)과 갑골상형 문자 측면에서 논하고자 한다.

 

1) 석(昔) : 고기에 의하면 ㅁ석유(昔有), 시유(時有)ㅁ라는 부사적인 표현은 “옛날에, 당시에 ... 있었다”로 해석된다. 예를 들면, 時有六書(당시에 육서가 있었다.) 고래(古來)는 옛날 이래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단군설화 고기(古記) 첫머리에 ㅁ석유(昔有)ㅁ를 단순히 "옛날에 ... 있었다"로 해석했고 아무런 문제가 없이 넘어갔었다.

그러나 단군신화의 배경이 신석기 시대 앙소와 용산문화 또는 홍산문화였다면, 그런 시대에 사용되었던 문자(文字)는 어떤 것이며, 그런 문자는 무슨 뜻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물을 수 있다. 단군설화가 기원후 13세기 고려 일연에 의해 최종 편집되어 전승된 설화이지만, 기원전 2333년 단군왕국이 건설되었다면, 설화의 시대는 선사시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의 역사적인 문화와 연결된다면, 은상대(殷商代)에는 갑골상형문(甲骨象形文)이 사용되었으며, 설화 본문의 한문(周代의 金文,秦代의 小篆, 宋代의 楷書의 사용)은 적어도 갑골문의 원의(原意)에 따라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한문(漢文)의 표기를 갑골문의 어원을 찾아 해석할 수 있는 한,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한문 안에 숨겨진 갑골상형문자의 진의(眞意)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은상대의 갑골문은 은허 지구에 묻혀 있다가 1899년에야 발굴되어 현재 갑골문 연구는 100년 안팎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장애가 되는 것은 단군설화의 본문을 한문과 함께 그의 구체적인 역사배경과 관계없이, 설화가 최종편집 되었던 저자시대에 국한해서 보려는 데 있다. 그러나 필자는 단군설화의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실제적으로 인정하여, 중국의 문헌에 따라 고조선 시대와 동시대가 되는 문화사적인 배경, 즉 앙소/용산문화와 홍산문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설화가 간직한 문학의 본문을 분석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군왕검과 요(堯) 임금이 기원전 24세기의 인물이라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앙소문화 후반과 용산문화 시기의 특징을 문헌에 따라 구별해 보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그 시대와 가장 가깝던 문자 갑골상형문(대체로 기원전 16 세기경 사용)에 따라 갑골문 언어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를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설화 본문 고기의 첫머리에 부사적인 용법 석유(昔有)를 해석하는 문제이다. 갑골문의 ㅁ석 昔ㅁ은 그림이 아닌 상형(象形)이다. 3줄기의 물결이 태양 위에 또는 그 아래 있다. 중국인 엽옥삼(葉玉森)은 석의 윗부분 災의 고자(古字), 아래부분 일(日)과의 결합형태를 보고 홍수(洪水)가 난 날이라는 뜻을 취하여, 석(昔)자로 해석했다. 허진웅은 "商 나라 사람은 홍수의 지닌날을 석 昔으로 표시하였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 참고할만한 자료는 陳煒愖 저, 『甲骨文導論』,이규갑외 공역, 2002년, 학고방, 139-140,가로와 세로의 3겹 물결형상은 홍수재난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재난으로 인신(引伸)되었다. 이런 3겹 물결과 그의 위 아래에 위치한 태양 모양을 결합한 상현문 昔은 홍수재난의 의미를 나타내는 지난 과거를 이야기 한다.

그 밖에 바빌론 세계창조 모형을 보면, 둥근 원형의 상반부는 3층의 하늘 대양이 있고, 맨 아래 지름부분에는 하늘대양 아래 위치한 태양이 동에서 서로 운행하는 그림이 나온다. 문자로 표현하면, 갑골문 昔의 형상과 일치하는 3겹 물결 아래 태양의 위치와 동일하다. 고대 바빌론인의 창조세계와 중국의 홍수재난의 형상이 동일한 것이 흥미롭다.

 

2) 서자(庶子) 해석 문제 :

단군설화 고기를 보면, 昔有桓因 庶子桓雄에서 ㅁ서자 庶子ㅁ는 적자 옆에 첩의 아들이거나 나라의 벼슬, 직함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갑골문에서 庶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아직도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어떤 개연성이 있는 해석이 흥미롭다. 손예철은 갑골문의 유화(類化)현상에서 庶의 분석과정을 지적하는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허신이라는 중국 갑골문 학자가 庶자의 자형에 대해서, 爲古文光字라고 하면서 庶를 光으로 해석했던 일이다. 그러나 高 明 편, 『고문자류편』, 398쪽을 보면, 손예철의 비평적인 지적이 맞는다. 허신의 해석은 오류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서자(庶子)는 사전적으로 적어도 3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금문상용자전(金文常用字典)』에 따르면, 서자는 1. 갑골문자로 서(庶)는 음식을 익혀먹는 불에 달군 조약돌을 말한다, 2. 고유지명으로서 서(庶)란 곳이 있다, 3. 관직(官職)으로 서자부가 있다. 주나라 시대 천자가 설치했던 고위직이다. 행정 관료를 임명하였다. 윤리도덕 교육을 관장하는 직책이다. 부모에게 효도, 형제들의 우애를 돈독히 하며, 인도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교육이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단군설화의 고기에 나오는 서자(庶子)는 중국의 하상주(夏商周) 나라 보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또는 동시대적인 문자 갑골문과 관련은 되지만, 금문상용자전의 어휘에 맞추는 것보다는 선사시대 상대(商代)의 인습(因習)에 가까운 의미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상대에는 한 아버지의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없이 한 형제들의 의미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왕위(王位)도 처음에는 형제상속이었다. 단군설화 고기에 부지자의(父知子意),즉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라는 문장에서 서자는 아들로 언급되고 있지 않은가? 환웅은 장자가 아닌 차자(次子)로서 환인 아버지 곁을 떠나 나라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3) 왕(王) : 단군설화 고기에 왕 칭호(王稱號)는 환웅천왕(王)과 단군왕검(王儉)에서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왕은 이미 상대(商代)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 중동에서는 기원전 5000년부터 왕국이 건설되어 왕의 통치역사가 있었다. 역사적인 시기 이전부터 왕(王) 칭호는 정치-종교적인 지도자에게 붙여졌던 칭호이다.

고대 국가와 현대 국가개념과 좀 규모가 작은 도시국가와 부족연맹체의 지도자가 왕으로 불러졌다(예. 이스라엘 사사시대에 부족연맹에 세겜도시의 왕 아비멜렉 왕). 아마도 고대 고조선 환웅도 이런 의미에서 제사장 왕으로 칭호를 받은 3000명 무리의 지도자였을 것이다. 특히 환인에게 받은 천부인 3개(거울, 칼과 모자 관(冠) 중 환웅이 머리에 쓴 관(冠)은 갑골상형문자의 “왕” (갑골문)을 의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모자는 삼각형 모형과 깃털로 장식한 모자에 대해서는 최남선(崔南善, 「단군고기잔석」, 『단군신화연구』(이은봉 편),온누리, 1986,p.24를 보라)이 이미 말한 바이다.

역사적으로 일찍이 기원전 3000년 초기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는 고등문명을 이룩했던 신정국가인데, 그의 왕은 설형문자로 군왕표시를 갑골상형문자 왕( 王 )과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한문(漢文)보다 먼저 있던 갑골상형문자를 통해서 동시대적인 관점(同時代的 觀點)으로 단군설화의 왕(王)칭호를 볼 수 있겠다.

하여간 한문화(漢文化) 된 단군설화 본문을 선사시대 배경 아래서 갑골문의 어의를 찾아 좀더 시간을 가지고 연구 조사하면, 지금까지의 이해했던 것이 전혀 다르게 해석될 가능성이 있으며, 상상과 추측으로 해석했던 것이 실증적으로 설득력 있게 그리고 과학적으로 해명될 날이 올 것이라 기대된다.

홍산문화(紅山文化) 유적에서 발굴된 채색도기에 새겨진 부호문자나 그 시대와 관계된 갑골문과 같은 문자를 구체적으로 탐구하여 고고학적인 유물과 문학을 병행해서 문서내용을 해석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4) 삼위태백(三危太伯) : 삼위(三危)는 고유명사 지명(地名) 또는 추상명사로서 3가지 위험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삼위는 중국 서쪽 변방 돈황 남쪽 산 이름으로 나온다(書經,淮南子). 산둘레 100리로 鳥鼠山이다(山海經). 융인(戎人)이 말하는 세 봉우리의 산을 말한다(尙書). 현재는 ㅁ감숙(甘肅)ㅁ 지역 어딘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는 태백과 결합되어 있다. 지역적으로 중국과 한반도에 걸쳐 있는 광활한 영토이다.

아직 국가영토적인 개념 보다는 인간 거주공간을 말하는 것 같다. 구약 창세기 8:4-21에서 홍수 후에 노아는 아르메니아 아라랏 산 정상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리는 이야기와 비교 된다. 대홍수를 피해 높은 산으로 올라와 제사를 드리는 종교행위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 추측에 따르면 다른 한편 삼위는 태백 고유지명을 수식하는 형용사가 되어 3가지 위험과 재난들, 즉 홍수, 화재와 전쟁(역병)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런 대재난이 반복되는 위험 속에 있는 태백 높은 산을 말 할 수 도 있다.

고대 선사시대의 중국 중원의 황하문명 지역의 대 홍수재난과 북만주 난하, 대릉하와 요하 강 유역에 발생하는 홍수재난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해마다 거듭되는 셀 수 없이 많던 홍수로 인하여 국가는 수도를 여러 번 옮겨야 할 정도였다. 역사적으로 상(商)은 홍수로 인하여 13번이나 천도했던 적이 있었다. 요나라 시대에는 홍수가 중국 전토에 범람하기도 했다. 따라서 홍수재난을 전후해서 높은 지대로 사람을 구출하는 지도자들의 치산치수(治山治水)의 세상통치를 ㅁ석유(昔有)-서자(庶子)-삼위(三危)ㅁ라는 어휘의 병렬에서 감지할 수 있다.

 

5)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단군설화 본문에서 "환웅은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 그는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을 맡아서 관장하고, 세상에 머물러 다스리며 교화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문장을 분석해 보면, 환웅은 무리(또는鬼), 3익(三翼), 5부(五部)와 세상인(백성, 百姓)을 거느리고 다스린다. 3000명의 무리는 어떤 부류들인가? 풍백, 우사와 운사는 누구인가? 그리고 5부의 행정(行政)은 누가 맡는가? 백성들은 얼마나 되며 어디에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환웅천왕의 왕권을 위해서 대답되어야 할 것이다. 천왕(天王)은 3000명 무리,3익과 백성통치에서 그의 왕권(王權)을 천명하고 있다. 태백산 정상과 신시(神市)는 그의 영토의 중심지로 정해졌다. 그의 아버지 환인 상제신이 주신 땅이다. 그리고 그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이미 살고 있었다. 이럼으로써 1.환웅천왕의 왕권, 2. 땅, 통치 영역, 3.백성이 왕국존재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증명한다. 그러나 문제는 3000명과 “풍백, 우사, 운사” 3익은 어떤 존재들인가? 그들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그의 정치적-종교적 또는 사회적인 배경이 궁금하다. 환웅천왕은 제정일치 신정국가(神政國家)의 최고 지도자이라면, 왕 주변에 측근들과 국가적 직무를 담당하는 계층이 준비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최우선은 국가 산업과 방위(防衛)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이미 국가들이 출현했던 역사를 익숙하게 알고 있다. 이미 기원전 3000년경부터 고대 왕국이 형성되고 왕이 전쟁을 통해 노예제도와 경제사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우리는 그런 의미의 왕(갑골 상형문자 ,王)을 알고 있다. 이런 왕의 측근에는 귀족과 전쟁을 위한 군대(軍隊)와 장군들이 직제(職制)를 맡았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풍백,우사와 운사를 문자적(文字的)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런 3 가지 칭호가 종교적인 신적인 존재로 해석도 되겠지만, 다른 한편 환웅천왕의 나라를 위해 3 칭호는 정치적인 직제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논할 필요가 있다. 우선 역사적인 자료를 가지고 3 가지 칭호와 비교되는 배경을 찾아내는 일이다. 단군설화가 기원전 2333년 전후 중국 요순우 시대와 하은주(夏殷周) 시대와 밀접한 역사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전제(前提)에서 문제를 풀어 보겠다.

은(殷) 시대에 왕권 아래 부자후백(婦子候伯) 등 근친 귀족이 있어 왕을 보좌했던 역사가 있다. 중국 상서(尙書),반경편(盤庚篇)에는 百執事가 나오고, 西周의 大盂鼎에는 殷正百辟이라고 했는 데 백관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예기와 곡례에는 六大와 오관(五官)이 나온다. 정현(鄭玄)은 주(注)에서 이것을 은제(殷制)라고 했다. 특히 풍백에서 백(伯)은 그 뒤에 나오는 우사,운사(雨師,雲師)와 구별되는 관직 같으나 . 여기서 사(師)는 백(伯)과 군대를 지휘하는 관직 같다. 그리고 오관(五官)도 주곡주, 명주, 병주, 형주, 선악 5가지 관장 업무와 비교 된다고 하겠다.

그럼 무리 3000명과 풍백, 우사, 운사(군사령관들)의 관계를 살펴 보자. 군대편제에서 10진을 주요 단위로 삼은 단위가 있었다(기층단위 10명 소대, 차례로 100,500,1000,3000...). 주나라가 상을 멸망시켰던 때는 1사(一師)가 5000명이었다. 상대(商代) 군대편제는 복사(卜辭)에서 등부호삼천(登婦 好三千)이란 기록이 있다. 비교적 큰 제후국에서는 군사가 3000 이상이었다. 복사에는 또 [왕께서 삼사(三師)를 만드시니, 우중좌(右中左)이다. 왕작 삼사 우중좌(王作 三師 右中左).

단군설화에서 환웅천왕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을 맡은 일은 은나라의 은제(殷制)에 나오는 백과 사(伯과 師)의 칭호를 가진 3 명의 군사령관과 비교되며, 왕이 전시(戰時)에 출동시키는 3000명의 병력 그리고 평상시 백성을 관장하는 5부(部)는 하와 은 나라의 5 관(官)과 비교된다. 누가 누구에게 이런 관직을 전해 주었는가하는 문제는 현재로서 밝히기는 어렵지만, 기원전 2000년 전후 왕검조선과 중국의 하은주는 요하 유역과 황하 유역에서 서로 교류하면서 공통된 국가제도의 관직을 설정한 것만은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서로의 국가 영토가 어떻게 경계 지어져 있었는지의 문제보다는 갑골문자로 기록된 복사의 내용으로 전승된 정치사회와 종교의 내용들이 크게 관심을 끌고 있다. 문서 전승이 매우 부족한 단군설화 배경 연구는 아마도 그와 가깝거나 동시대의 역사와 비교를 통해서 단군설화 내용의 역사성을 설득력 있게 증명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단군설화는 결코 왜곡된 문서나 후대의 상상이 추가된 부가물(附加物)이 아닐 것이다. 고대의 미미한 것을 과장한 것이 아니라, 실재 있었던 것을 그대로 복원하여 그의 위상(位相)을 밝히는 작업일 것이다.

부설(附說: Exkurs): 상대인(商代人)의 갑골복사에 나타난 상제(上帝)는 창조영역에서 해, 달, 별, 바람, 구름, 벼락과 천동 그리고 비를 제사(帝使),제신(帝臣)으로 부린다. 그리고 그는 특히 바람, 구름, 벼락과 비를 농산물 수확, 가뭄과 풍요로 관장한다. 이런 창조 영역의 징조들은 신격화 되어 기능적인 신(機能神)으로 해석 된다. 이들은 신석기 시대 농경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농산물의 풍요 또는 재앙의 세력(Ambivalenz : 동일한 대상에 대한 반대 감정의 양립(병존) )으로 신성시 되었다. 일차적으로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신격화 하여 풍신(風神),우신(雨神),운신(雲神)으로 해석한 작업이 있다. 이은봉은 1) 운신(雲神)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요점만 취해 보면, 구름은 은(殷) 나라에서 화(禍)를 가져오는 영수(靈獸) 용(龍)의 형태로서 신성한 신의 뜻이며, 신위(神威)를 나타낸다고 했다. 2) 우신(雨神)은 장마와 홍수 재난과 화(禍)를 가져오는 위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3) 풍신(風神)은 상제의 직접적인 사자 역을 담당하고, 자유자제로 사방 각지를 다니며, 상제의 명령을 전달한다. 상제의 대리자로서 사정관(司政官) 역할을 수행한다. 상제의 의지를 전한다. 이은봉은 이런 3 신의 기능을 매우 유익하고 가치 있게 해설하고 있다. 3 신 기능의 공통점은 각자 위력을 가지고 구원의 역할을 하지만, 적수에게는 禍를 가져온다. 그리고 상제신의 의지를 전하며, 그의 직접적인 사정관(사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은봉은 환웅이 이런 신들을 부리고 있다는 데에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상제신이 부리는 3 신들을 환인(단군설화에서 최고 신)이 아닌 인간 환웅천왕이 부린다는 것은 무언가 혼동(混同)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와 비슷한 논조는 이강식에게서도 나타난다(이강식, 「3神 5帝 思想에서 형성한 고조선과 고구려의 3韓 5加 組織의 구조와 기능」,2005년,12,『단군학 연구』 제 13호,248.250.252 참조: 이강식은 천신교 교리체계에서 “환인천제에게서 땅에 내려와 등극함으로써 환웅천왕은 천제(天帝)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환인과 환웅의 본질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단군설화에서는 풍신(風神) 대신 風伯이며, 우신(雨神) 대신 雨師이고, 운신(雲神) 대신 雲師가 등장한다. 즉 신(神)이 아니라 백(伯) 또는 사(師)라는 사실이다.이에 대해서 이강식(상게서,250.252)은 신시에 3伯 5事 조직을 언급하고 있다. 백(伯)과 사(師)의 칭호를 백(伯)으로 통합시키고 있다. 3과 5라는 구조는 생각해 볼 수 있으나, 3 백의 기능이 무엇인지는 말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천신교 종교 테두리 안에서 제사집행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필자는 제사보다는 정치-군사적인 기능에 역점을 두고 설명하겠다. 그럼 이런 칭호 앞에 수식어 또는 복합어(風, 雨, 雲)는 무엇을 의미하려는 것일까? 이런 신적인 명사(名詞)들은 백(伯)은 하상대에 왕의 근친 귀족이기도 하다)과 사(師)라는 관직의 권위와 신성한 임무를 나타내려는 것이 아닐까? 그래야 그들은 환웅천왕의 신하가 되고, 환웅천왕은 상제신 같은 최고의 통치자로서 그의 신하들을 기능신들처럼 부릴 수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런 3 기능신들은 3 신하들로서 인간 통치자를 모시는 왕의 의지를 전하고(風 伯), 그의 적수들을 공격하여 패배케 하는 군사령관 기능(雨師, 雲師)을 수행하여 화(禍)를 보내는 동시에 자기들을 위해 구원과 승리를 보내는 사자(使者)가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환웅천왕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렸다는 문장이 국가 방어와 전쟁에 대비하는 군사 3000명과 3인 군사령관의 등장을 표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와 비슷한 정황은 이미 상대(商代)를 반영하는 역사와 가깝다. 따라서 단군설화는 신화와 신(神)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상대(夏商代)와 동시대적인 단군왕국과 백성 그리고 군사령관의 임무를 신적인 위력과 권위로써 서술하는 역사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런 인물들을 신화적으로 신성시하는 고대인의 서술방법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환인 상제신(桓因 上帝神)과 환웅(桓雄)의 재해석(再解釋)

 

이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겠으나, 고기(古記)에서 말하는 환인과 서자(庶子) 환웅,환웅이 거느리는 풍백,우사,운사의 신적인 존재들은 신 자체(神者體)가 아니다. 그들은 신(神)과의 관계에서 불러지는 신적인 칭호(稱號)들이며, 거룩한 인격(人格)이며, 신에게 맡겨진 인간존재이다. 따라서 어느 때는 ㅁ하느님(지존자)의 아들들ㅁ로서, 어느 때는 ㅁ사람이나,고관(高官)들ㅁ로서 불러지는 존재이다(시편 82:6-7 참조). 그들은 신들의 회의(會議)에서 하느님과 대화하고,의논하는 자리에 있지만, 심판도 받고,죽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현재 단군신화의 환웅과 단군의 존재는 신존재로 신격화 내지 신인화(神人化)된 존재로 혼동되고 있다. 고대 천상회의에서 유일신 하느님은 3인의 측근을 두고, 예언자나 사사들(士師,군장(軍將)들로 불리운다)을 불러 아들이라 부르며,지상(地上)의 일을 맡겼다. 이런 맥락에서 환웅과 단군 그리고 풍백,우사와 운사가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이에 대해서 방석종저, 『신화와 역사』,「단군신화의 천상어전 회의와 소명설화」,2006년,7-13쪽 : 삿 6; 왕상 22:19-21;사 1:18-20; 렘 23:18;시 82:1-2.6-7 등 참조). 환인 상제신은 지상과 떨어져 있는 보이지 않는 천상에 격절(隔絶)되 있는 것 같지만, 그는 환웅과 의논하고, 세상을 내려다 보고, 인간을 이롭게 하며, 아들에게 천부인(天符印) 3 개를 주어 소명(召命)을 맡기는 분이다. 이런 환인(桓因)의 신적인 행위는 환웅의 위력에서 계속 현현된다. 환웅이 3000명과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게 했다. 고로 환웅의 세상통치는 환인의 명령이지, 환웅 자신의 권위와 독자적인 힘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단군설화에서 환인이 환웅에게 맡기는 신적인 행위를 부지부식 간에 환웅의 것으로 전담(全擔)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런 국민적인 의식이 바로 최고 통치자로 하여금 성역(聖域)의 일인자(一人者)가 되게 하는 죄(罪)된 역사를 낳게 한다. 신(神)의 일을 인간(人間)의 일로 바꾸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적(神的)인 일을 차단시키는 것이다. 결코 환인 상제신은 ㅁ격절신(隔絶神)ㅁ이 아니다. 그는 환웅의 통치에서 계속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는 환웅과 “의논하고, 세상을 관심하고,인간사를 구원하며,인간을 아들로 불러, 그의 힘을 맡기는”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는 신(神)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단군신화에서 환인 상제신의 품성(稟性)과 행위(行爲)를 몰라보고,인간 환웅만 쳐다보고 있었다.단군설화(신화) 연구가들은 환인의 본질문제에만 급급했지, 설화 본문(本文)에 서술된 환인의 품성에 대한 구체적(具體的)인 문자적(文字的)인 해석에는 등한(等閑)했다 : 환인의 아버지됨, 세상을 내려다 봄, 인간의 구원, 신적인 의무를 허락함에 대해서 보다 풍부한 이해를 촉진해야 할 것이다.

 

2. 석유환인(昔有桓因),삼위태백(三危太伯),홍익인간(弘益人間)의 어의와 문구분석 문제

 

대홍수 재난(大洪水 災難)과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관계성에 대한 재해석(再解釋)

 

단군설화 본문 : 고기운(古記云)

 

"대 홍수 재난이 있던 때 환인의 서자 환웅이 수차례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탐하여 구하니(昔有桓因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父知子意), 삼위태백아래를 내려다보니(下視三危太伯)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함이라(可以弘益人間),이에 아들에게 천부인 3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乃授天符印三個 遺往理之)환웅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雄率徒三千),태백산 마루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降於太伯山頂,神壇樹下)이곳을 신시라 이르고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불렀다(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위의 본문은 고기(古記) 첫머리에 나오는 ㅁ천상계(天上界)ㅁ의 정황이다. 석유(昔有)는 일반적으로 ㅁ옛날로ㅁ불러지는데 그와 연결된 환인이 신이라면, 석(昔)은 단순한 ㅁ지난날ㅁ로 해석될 수 없다. 어떤 사건(事件)이 있던 과거의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에 대한 연결된 상황은 하시삼위태백(下視三危太伯)에서 삼위태백(三危太伯)의 높은 지대는 홍수의 대재난의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지대로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弘益人間)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昔有桓因, 三危太伯, 弘益人間 이 세 개의 어휘들과 문구(文句)는 동일한 정황과 그에 대한 대처행위를 암시한다. 인간의 생활을 위협하는 재난과 위기 그리고 그를 극복 해결하는 구제행위에 간섭하는 신적神的)인 영역을 추상(推想)할 수 있다. 특히 [옛날]로 읽어 왔던 석유는 문자적으로 갑골문자(甲骨文字)의 기원을 갖는다면, 昔은 商代의 사람들이 홍수의 재난의 개념을 가졌던 지난날이 된다. 이런 대홍수의 재난의 기억은 각 민족의 공통적인 것이요, 그들의 창세신화의 요소를 이룬다.

이와 문학적으로 평행(平行)되는 것은 중국 문헌에도 나온다. 상서의 반경편, 굴만리(屈萬里,상서(尙書), 107-108; 당란(唐蘭),1973; 7-8에 보면 “천도하기 전후에 상왕 반경은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은나라에 크나큰 재난이 내리니(홍수), 선왕께서는 마음속으로 불안하게 여기셨다. 이에 일어나 백성의 이익(利益)을 살펴 천도하기에 이르렀다(殷降大虐, 先王不懷, 厥修作, 視民利用遷).“ 그리고 계속해서 "옛날 나의 선왕께서 아주 많은 공적을 쌓으셨으니 그분들은 모두 지대가 높은 곳으로 옮기셨다(古我先王 , 將多于前功, 適于山)"는 기록이 있다.

전체적인 문학적인 구성이 내용적으로는 차원(次元)이 다르지만, 민족의 대재난 홍수사건을 당한 지도자들이 백성의 세계의 관심을 두고 실제로 간섭하면서 그들을 높은 지대로 인도하여 도와서 구하였다는 내용은 공통적이다. 단군설화(檀君說話), 또는 단군사화(壇君史話)는 신적(神的)인 영역에서 환인 상제신(桓因 上帝神)과 그의 아들 환웅천왕의 대화와 동의의 과정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었다면, 중국상서 굴만리의 기록에는 자연재난을 당한 선왕이 백성을 도와서 이익을 살펴 안전한 높은 지대로 옮겼다는 정치적인 공적을 진술하고 있다. 전자는 신학적-종교적 제정일치(祭政一致)의 면이 지배적이라면, 후자는 세속적-정치적인 측면이 두드러지고 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단군설화는 고유명사와 고유지명을 상술한 데 비해서, 상서(尙書)는 은(殷) 나라 외에 고유지명의 구체적인 표현이 없다.

이상을 정리하자면, 단군설화에서는 환웅시대의 홍수 재난을 말한다면, 중국 상서 굴만리는 은대(殷代)의 홍수재난을 말하고 있다. 시대적으로 환웅천왕은 늦어도 용산문화 이전(기원전 2300년-1800년) 시기인데, 은나라는 용산문화(龍山文化)의 기원(紀元)을 가진 후대의 시대(기원전 1800년-1100년)에 속한다. 그리고 문자적-문학적으로 갑골문자(甲骨文字)의 기원을 보이는 ”석유(昔有)“가 홍수재난을 의미하는 상대(商代)의 표시라면, 그것은 그 시대와 가까웠던 요임금(堯) 때(기원전 2300년경)의 홍수재난을 기억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단군설화에서 대홍수의 재난은 단군왕검(檀君王儉,기원전 2333년) 이전 환웅천왕의 시기로 올라간다. 즉 요임금 이전 더 오래 되었던 대홍수시기를 기억하는 과거의 대홍수 재난이 단군설화 고기(古記) 벽두에 나오는 ㅁ석유ㅁ(昔有)로 표현된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문학사적으로 그것이 고대의 구전적(口傳的)이든 전승된 기억(記億)이든 단군설화의 대홍수 재난을 시초로 환웅천왕이 인간을 대홍수의 위험에서 구원할 높은 지대의 산들을 내려다보고 인간세상을 사랑하며 관심을 보여 도와주고 인간(人間)을 구원한 지도자라면, 은 나라의 선왕은 민(民 )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나타난다.

시대적으로 홍익인간 시대 이후 에 오는 ㅁ민리(民利)시대ㅁ라 할 수 있다. 좌우간 시대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고조선 족이 중국의 족속 보다는 국가를 먼저 세우고 문명을 일으켜 후대의 중국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만은 사실로 드러났다. 갑골문자원형 ”석(昔 ,홍수의 재난)“과 함께 역사가 시작 된 나라는 인간 위에 환인 최고의 절대신의 존재를 주인으로 모시고 출발했음을 명시(明示)하고 있다.

부록(附錄) : 단(壇)과 요(堯)는 고대 중동 바빌론의 유프라테스 강 유역 ㅁ지쿠랏트ㅁ(Zikkurat,인공으로 쌓아 올린 흙 언덕 산 위의 신의 제단 성(城) ) 신전(神殿)의 제단과 공통점이 있는 흙을 쌓아 올렸던 형태와 일치된다. 홍수의 재난(災難)을 대비하여 신을 향하여 만든 제단이다. 다만 요(堯)는 제단 보다는 민을 위한 농토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흙으로 쌓은 뚝(제방)만을 의미하는 것 같다.

삼위태백(三危太伯)에 관하여 : 『서경』과 『회남자』에 의하면, 삼위는 중국 서쪽 변방 돈황 남쪽 산 이름이다. 『산해경『에는 삼위산은 조서산 서쪽을 가리킨다. 그리고 『상서(尙書)』는 융인(戎人)이 말하는 3 봉우리 산을 언급하고 있다. 제왕운기의 註와 승람 권 42는 구월산, 아사달에 삼위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삼위는 고유지명(固有地名)으로서 돈황 남쪽이고, 융인이 아는 3 봉우리 산이라면, 이 산은 현 ㅁ감숙(甘肅)ㅁ지역이다. 즉 내몽고 자치 지구와 신강 자치구 중간 지역 어딘가 있다. 그리고 태백은 아사달 또는 묘향산이라면, 한반도 지역이다. 만주지역을 벗어난 40도/95도 선상과 천산산맥 아래에 있는 중국 서북쪽의 지역에서 한반도 지역에 미치는 광활한 지역을 살펴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삼위는 중국지역에 있는 산의 고유지명이고, 태백은 한반도에 있는 산의 고유지명이다. 멀리 떨어진 두 개의 다른 지역이 결합된 것은 영토사적인 관점에서 오랜 역사 기간을 지나면서 고대전승과 후대전승이 문헌적인 근거를 가지고 어느 시점에서 고정(固定)된 편찬 작업을 보여주는 것 같다. 확실한 것은 후대 태백이라는 지명이 한반도(韓半島) 묘향산에 일치 한다면, 중국과 만주에서 한반도로 이동했던 역사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위에 인용된 『위서(魏書)』에 기재된 아사달과 동일한 한반도내의 지역에 일치한다. 따라서 『위서』의 편찬연대에 가까운 시대에서 『고기(古記)』의 편찬을 생각해 볼 수 있다.

 

3. 대홍수 재난과 홍익인간에 관한 문학적인 평행(文學的 平行) :

 

1)단군설화에 나타난 문장양식

 

고조선 시초: 昔有桓因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遺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 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대 재난이 있던 때 환인의 서자 환웅이 수차례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려고 탐하니,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 아래를 내려다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함이라,이에 아들에게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으니, 환웅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이곳을 신시라 부르고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불렀다."

 

2)중국 상서(尙書) 반경편(盤庚篇)에 나타난 문장양식

 

중국 은(殷나)라 시초 : 殷降大虐(昔有桓因), 先王不懷(庶子... 數意天下), 厥修作(貪求人世)

,視民利用遷(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古我先王,將多于前功(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 神壇樹下), 適于山(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천도하기 전후에 상왕 반경은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은나라에 크나큰 재난(홍수)이 내리니, 선왕께서는 마음속으로 불안하게 여기셨다. 이에 일어나 백성의 이익을 살펴 천도하기에 이르렀다,(그리고 계속해서) ”옛날 나의 선왕께서 아주 많은 공적을 쌓으셨으니, 그분들은 모두 지대가 높은 곳으로 옮기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4.양식사적 비평(樣式史的 批評)과 삶의 자리 (Sitz im Leben)

 

위에 두 본문은 대홍수 재난을 당했던 인간 백성세계를 위해 환웅천왕(고조선)과 은나라 선왕(先王)이 마음에 염려를 나타내고, 세상에 들어와 인간/백성을 위해 구원하는 일에 힘쓰는 업적을 세우고, 특히 낮은 벌판에서가 아니라 높은 산에 자리를 잡아 거주지를 확보하는 역사를 이루고 있다. 단군설화는 종교적으로 거룩한 신시의 축성(築城을) 기술하고 있는 반면, 중국 문헌은 정치사회적인 세속적인 도시(都市)를 건립한다.

지금까지 단군설화의 초기역사적인 상황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채, 환웅의 태백산 아래로 하강했다는 신화적인 서술로 종교제단에만 관심을 집중해 왔다. 그리고 환인의 존재는 주목하지 않았던 편이다. 왜냐하면 단군설화 연구자들은 석유환인인가? 석유환국인가? 라는 논쟁에만 관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필자는 본문 맨 앞에 “석유(昔 有)”는 앞에서 상세하게 설명한대로 상(商)나라 이후 대홍수 재난의 개념을 가진 갑골문에서 연유했던 의미를 가지고 단군설화의 시초역사(始初歷史)를 보고, 그와 연결 될 수 있는 홍수재난을 피할 수 있던 안전지대로서 삼위태백(三危太伯)이라는 높은 지대, 그리고 인간과 백성들이면 누구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弘益人間이라는 통치이념을 어의학적인 평면에서 시도(試圖)해 보았다. 이런 사자성어(四字成語)의 나열과 어의학적인 연결은 고조선 건국의 시초가 대홍수 재난에서 요청될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따라서 고대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창세신화와 홍수 사건이 ㅁ요하, 대릉하와 난하ㅁ 유역에 있던 고조선인들에게 체험된 역사요, 그런 위기 속에서 환인이라는 신(神)의 문제, 환웅( 桓雄)의 군장적인 지배체재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보게 한다. 중국 중원과 황하의 대홍수 재난의 역사가 하은주(夏殷周)에서 기억보존 전승되었던 것처럼, 동북지역 여러 강의 대홍수의 기억도 고조선 단군설화 벽두에 ㅁ석유환인(昔有桓因)ㅁ이라는 문구로 -갑골문자 ㅁ석(昔)ㅁ 대홍수 재난의 과거-작성될 수있었다면, 우리는 이제부터 옛날 이야기 속에 현실적인 위기의식과 목적 없이 그냥 환인과 환웅 있었다를 대홍수 재난을 염려하고 하늘에서 높은 산들을 보고 그곳으로 가서 인간/백성을 살렸던 환인과 환웅의 역사를 찬양해야 할 것이다.

 

5. 결과

 

일반적으로 고대 고조선은 일본과 중국의 정치적인 의도 때문에 역사적으로 잘 알려지지 못했던 우리 역사의 부분이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되어 망각되었더라도, 땅속에 묻혀 있던 유적과 유물은 언제건 밝혀지게 되어 있다. 근자에 만주지역(중국 북경 근처 포함)에 홍산문화와 우하량 문화 그리고 하가점 하층문화가 발굴됨으로써 고조선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ㅁ우하량의 여신제단ㅁ은 곰과 호랑이 토템 종교의 배경을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단군왕검은 중국 요 임금과 동시대의 전설적인 시대에 있었으면서, 하가점 하층 문화와 환웅시대와 함께 모계와 부계사회의 변천과정을 환웅과 웅녀의 결혼 이야기의 배경을 말하고 있다. 석유환인-삼위태백-홍익인간의 병렬은 두 가지 측면을 새롭게 보도록 기여하고 있다:

하나는 갑골상형문자로 석(昔)은 선사시대의 대홍수 재난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필자는 이런 어의(語意)를 단군설화 석유(昔有)에 끌어 드려 ㅁ옛날에ㅁ를 ㅁ대홍수 재난이 있던 때ㅁ로 재해석 했고, 상대(商代)에는 서자(庶子)를 적자와 구별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자를 관직으로 해석하려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문맥상 맞지 않는다. 고조선은 하은(夏殷) 나라와 가까이 있으면서 인습적으로 가족의 의미로 서자를 사용했으리라 생각 된다.

다른 하나는 대홍수 재난과 홍익인간과 평행 되는 중국 『상서(尙書)』 「반경편」에 기록된 은나라의 홍수 기록에 관한 문학적인 평행문(Parallel)의 양식사적인 비교분석이다. 내용은 앞에 II. 문제제기와 방법론 아래 3.을 보라. 이런 언어적-문학적인 작업을 고고학적인 유적/유물과 연결해서 탐구하여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망각된 역사적 실체와 문명 속에 불변요소들이 생명으로 소생하여 일어 날 것이다.

 

 

III. 단군설화 본문의 문화사적인 고찰

 

1. 곰과 호랑이 토템(Totem)과 앙소문화(仰韶化文) 시대

 

단군사화 주석 본문 : 『고기』 이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時有一熊一虎同穴而居) 늘 신령스런 환웅에게 변하여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常祈于神雄願化爲人).

 

이 본문은 ‘무리사회(마을사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원시 사회의 초기 단계를 반영한다고 본다. 고대 중국 문헌들 『여씨춘추-시군람』, 『예기-예운』, 『한비자-오두』와 고서기록에 의하면, 원시 무리사회를 여러 면에서 진술하고 있다. 특히 모계, 여권 주도 사회와 토템종교 현상을 나타낸다. 『여씨춘추-시군람』에 보면, 태고에는 군(왕)이 없었다. 어머니(母)는 알고 있으나, 아버지는 모르고 일부일처 가정이 아직 출현하지 못하여 세계(世系)는 묘계가 주축이었다.

『예기-예운』에는 "옛 선왕은 궁실이 없어 겨울에는 영굴에서 거주하고 여름에는 증소에서 거주하였다." 『한비자-오두』에는 "상고에는 사람은 적고 금수가 많아 사람은 금수를 이길 수 없었다" 고 했다. 고서기록에 의하면, "고대 황하 유역에는 삼황오제의 황제부락과 강서 염제 부락이 있었으며, 황하 하류에는 태호씨와 소호씨가 있었다. 태호씨는 몸은 뱀이고 머리는 사람인데(蛇身人獸), 용으로 관명을 하였고, 소호씨는 새(鳥)로서 관명을 하였다. 태호씨는 뱀토템 부락에 속하며, 소호씨는 새토템 부락에 속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는 기원전 6000년-5000년 전 삼황오제 시기를 전후한 원시사회 시대이다. 이는 앙소문화(5000-2500년)에 속한다.

앙소문화는 신석기 시대를 대표한다. 앙소문화는 1921년 스웨덴인 엔더슨이 하남성 승지현 앙소촌에서 채도와 석골기를 발굴한 데서 유래한다. 토기색채는 홍, 흑, 백색이다. 그 외에 요녕에서도 채도문화가 발굴되었다. 앙소인들은 이미 농경정착 생활을 향유하였다. 앙소인 골격은 몽고인종에 속한다. 그리고 남중국인계와도 아주 유사하다(앙소인은 현 중국계 조상이었다고 본다).

본인의 견해로는 신석기 시대에 몽골인 조상에서 몽골계와 중국계 앙소인이 갈라진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곰과 범 상이한 짐승은 이런 두 계통의 인종을 토템신앙으로 상징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 때 사회제도는 부녀들의 사회적인 지위가 높았으며 모권적인 씨족사회가 형성되었다.

*관련 고고학 유적지와 발굴물들: 원시시대(기원전 6000-5000년 전)와 앙소문화(5000-2500년)는 심양시 황고구 황하북대가 용산로 원시우배장경에 유적지로 보존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원시 반지혈식 거주형태와 땅굴 구멍이 두어 군데 메어진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우리 나라 제주도 삼성혈(三姓穴)과 비슷하다. 이는 토템 곰과 범이 같은 굴에서 살았다는 내용과 일치한다고 본다(기원전 10000년 전).

 

우하량, 동산취, 호두강의 홍산문화(紅山文化 ,기원전 4000-2000년)는 중국의 앙소문화(기원 전 5000-2500년)와 동시대이다. 우하량의 여신 제단은 기원 전 3500년 전 유적지이다. 제단의 원형은 남자 걸음 4걸음의 정방형 크기이다. 여러 석곽 묘지와 성인 걸음 2걸음의 무덤, 석곽들, 석널판 묘지 그리고 옥기 20개 정도가 발굴되었다고 한다(사진 참고). 우하량 이곳은 ㅁ女神故鄕ㅁ이라는 기념비가 도시로 진입하는 다리 입구에 세워져 있다. 요하의 문명 지대에 오래 전에 [웅녀=지모신]신앙이 토템형태로 있었던 것을 추측해 본다.

삼좌점 유적지에서 촬영 제재를 당했다. 안내자들은 우리들 일행에게 주의를 줄 정도였고, 홍산 유적지에 대한 공개를 꺼리는 것 같았다. 사진으로 어느 정도 볼 수 있겠지만, 요하문명 지대의 유적지는 대체로 공통적인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높은 산성과 고지대(고원 지대)의 취락 지구이며, 강물과 냇물이 넓게 흐르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에도 산기슭을 스치는 바람이 상쾌하다. 언덕은 이미 조밭이나 옥수수 밭으로 가꾸어지고 있다. 햇빛이 풍부하고, 넓은 들판을 거칠 것이 없이 조망할 수 있었다. 앞에는 강물, 뒤에는 산 그리고 수십리 또는 수백리 밖의 산들이 원시 마을들을 둘러치고 있다. 제단은 언덕 평평한 곳이고 마을과 전답의 중심부에 있다. 강변 높은 고지대는 외부의 공격을 의식하고 자리를 잡은 것 같다(별첨 사진2 참고).

 

2. 환웅과 웅녀(熊女)의 결혼과 용산문화(龍山文化) 시대

 

단군사화 주석 본문 : 『고기』 여자가 된 곰은 더불어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熊女者無與爲婚), 매번 단수 아래에서(故每於壇樹下), 아이를 잉태하게 해달라고 빌었다(呪願有孕),

 

이 때는 마을사회와 고을나라의 시기였다. 기원전 2800년-2000년 기간이다. 중국 하남,섬서, 산동, 하북성 또는 그 인근 지역 호북, 강소, 요령과 감숙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용산문화는 앙소문화(5000년-2500년) 보다 농업생산 규모가 확대 되었고, 마제석기를 사용했다. 용산문화 말기에는 모권제가 점차로 부권제(父權制)로 이양되었다. 용산문화는 기원전 2300-1800년에도 계속되었다. 동으로 발전하여 산동성 지역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농경문화의 목제보습도 나타난다. 삼황시대 신농의 목재 농기구가 발명 된 기록도 있다. 채도는 흑색, 회색, 홍색, 백색이 나온다. 일부일처제가 시작 되었다. 환웅과 웅녀의 결혼이 본보기가 된다. 남성 조상 숭배 습속이 생겼다. 사유재산의 형성과 빈부의 차이, 사회경제적인 편중과 불평등의 현상이 나타났다. 부권적인 사회가 정착 되었고, 정치군사적인 특권층이 형성되었다. 그와 일치해서 삼황오제 중 황제(黃帝) 는 무력(武力)으로 중국을 최초로 통일 하였다.

그와 대조적으로 환웅은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천왕(天王 )으로 제사장 형태의 통치자로 등극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 통치를 시작했다. 군사적인 무력 대 제사장적인 사원통치의 긴장이 생겼던 시대이다. 기원 전 3000년 경 석기시대 중동의 수메르의 우룩 4세와 드옘데트 나스르 시대(도시국가의 제사장적인 왕, 최고 제사장, 전쟁 군주의 기능을 갖춘 통치자, 기원전 2800년-2700년)와 흡사한 환웅천왕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 삼황오제가 무력적이라면, 고조선(단군조선의 전신)은 종교적 덕치주의라 볼 수 있다.

 

* 용산문화 유적지 :

하가점 하층문화(기원전 2500년-1500년)와 비파형 동검의 출토. 이에 관해서는 한창균의 고조선의 성립배경과 발전단계 시론,13-33쪽 참조; 윤내현 교수는 그의 『고조선 연구』, 127 쪽에서 한창균의 연구는 크게 주목받을 만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IV. 고조선의 영토사적인 고찰

 

1. 고조선 영토전승(領土傳承) 의 문제

 

만주 지역에 고조선 유적이 있다는 논문들과 조언(복기대 박사, 하문식 박사 등)에 힘을 얻어 요동반도 일대와 요하 일대를 탐방한 결과 신석기 시대 이후 중국 북경 근처 난하와 동북 만주 지역에는 중국 중원 황하문명과는 다른 요하문명(遼河文明), 즉 고조선 문명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증거가 되는 고고학적 출토물들 : 비파형동검, 세형동검, 돌무지무덤, 돌곽무덤, 고인돌무덤(지배층무덤), 미송리형토기 등이 고조선 문명의 특징을 나타낸다.

 

중국 북경 근처에서 동북평원(東北 平原)이 동북 쪽 요하를 따라 북상(北上) 하여 여러 강들 수강, 송화강, 목단강, 흑룡강, 오소리강 등 그의 유역을 지나 연해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해안을 따라 한반도 서부평야와 연결된다. 이런 지역에서 출토 된 비파형 동검은 예,맥, 고구려, 부여, 진번, 조선족에 의해서 제조된 것이다. 이런 지역의 나라들을 윤내현은 고조선을 중심한 거수국(渠帥國)이라 부른다. 현대적인 의미로 거수국을 연방국(聯邦國)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고 본다.

난하유역(북경근처)을 경계로 난하 서쪽의 중원과 난하 동쪽의 만주(남만주와 북만주)와 한반도 남부까지 분포된 지역의 다른 문화를 지적하고 있다. 정치사적으로 난하 서쪽 황하와 중원(中原)의 하(夏), 상(商), 서주(西周)의 강한 정치 세력과 고조선은 마주하고 있었다이런 일대는 조선족을 중심(中心)했던 만주족들이 연방국 형태로 중국과 달랐던 요하문명을 발전시켰다.

文明은 전통형성(傳統形成)의 바탕이 된다. 이것을 3가지로 나누어 그의 합법성과 정당함을 인정받으려면 역사와 문화 차원에서 가능하다. 필자는 이런 전통형성 이론(理論)을 학술적인 차원에서 다루며, 전문적인 근거와 확실성에 맞추어 구성하려고 한다.

이런 해석 방법을 단군사화 본문에 적용하여 필자는 단군왕조의 전통과 영토 전승을 일반인과 전문 학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법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여러 사화(史話)들을 주의 깊게 보면, 그 안에는 일반적인 표현 기술 속에 여러 관점들과 다양한 해석이 담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특히 단군 관련 사화들을 살펴보면 그 속에 오래고 다양한 역사성을 함축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이번 고조선 유적을 탐방하고 나니 단군조선이 중국과 동시대에 만주 땅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일으켰고, 정치적으로 중국과 교류 또는 투쟁하면서 중국 북경 근처에서 고조선을 건국했고, 만주 전체의 영토에 걸쳐 난하, 대릉하와 요하, 송화강, 목단강, 흑룡강, 오소리강 유역에서 요하문명을 형성했던 세계사적인 문화 민족이라 느꼈다면 동감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필자는 의심이 앞선다. 국수주의자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고 본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에서(구석기-신석기 시대) 정치적인 존재(청동기 이후 시대)로 발전했다. 민족사를 제대로 확립하려면 조상들의 행위와 업적을 객관적이되 주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전통을 분석하여 역사와 문명의 법적인 근거로서 합법성(合法性)을 유지해야 한다. 전통이 형성되려면 어떤 요소들이 있어야 하나? 위에서 말한 G. Fohrer의 이론을 빌려 3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1)고조선 역사 이전 문화를 중국의 문화와 비교하면서 구석기-신석기 시대로 돌아가 그 유적을 보고 우리 조상들의 선사시대(先史時代)에 관심을 가진다. 그들의 생활 유적이 나온 정착지역(영토)을 우리의 영토로 계산하는 의식이다.

2)고조선의 출발 연대와 멸망의 연대 동안 이웃에 있던 나라들(중국과 조선족 계열, 연맹의 공동체 집단)과 가졌던 정치적인 긴장관계 그리고 영토의 확장과 위축의 시대를 관심하고 우리의 고유한 정신과 문화를 추적하는 것이다.

3)고조선의 정치적․종교적인 지도자의 그룹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행위와 업적을 승계하는 과제를 가짐과 동시에 영화의 역사와 고난의 역사를 민족적인 성찰 요소로 보존하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 정리하면, 우리는 영속적으로 ‘영토와 민족’이란 두 개의 주제를 전통이란 정신적인 의식에 두고 현재화(現在化)할 과제를 가지고 있다.

 

2. 요하문명 對 황하문명의 역사적인 관계

 

고조선 유적에 대한 문헌 기록은 국내 자료와 중국 자료를 함께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우선 『심국유사』 속의 단군사화와 그 속에서 제시한 고문헌들을 토대로 해서 비교 분석해보고자 한다. 특히 삼국유사에서 인용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서들 위서, 당배구전과 통전에서 여러 지명들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예를 들면 아사달(위서), 고죽국(당배구전), 현도, 낙랑, 대방(당배구전), 진번, 임둔(통전) 등이다. 그런데 고기에는 삼위태백, 태백산, 평양성, 조선,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 아사달의 지명이 다양하게 나열되고 있는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런 지명들의 지리적인 위치는 어디인가? 어느 시대에 있던 지명(도시)인가? 이런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대답이 요청 된다. 이에 대해서는 우선 사화의 본문을 직접 대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 하겠다.

 

『위서』에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불렀는데 중국의 堯와 같은 때이다. 『고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중략) 왕검은 요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이 되는 경인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불렀다.

 

단군왕검이 중국의 요와 같은 시기에 아사달 평양성에 도읍하고 조선이라 불렀다고 한다면, 단군은 이미 국가형태의 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단군왕검 이전에 이미 ‘환웅천왕’이 지상에서 통치를 한 내용이 나온다. 단군왕검 이전의 나라와 사회형태는 어떠했던가? 이에 대해서도 우리는 단군사화 본문을 토대로 분석할 수 있다. 환웅이 세상을 통치하기 전부터 곰과 범이 같은 굴에서 살았다는 구절에서 ㅁ무리사회ㅁ, 곰과 범이 인간이 되기를 빌던 중, 곰만 인간 여인이 되어 살던 시대는 ㅁ마을사회ㅁ], 웅녀가 환웅과 결혼하여 살았던 시대는 ㅁ고을나라(부족사회)ㅁ의 사회상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윤내현의 "환인시대는 떠돌이 생활을 하던 무리사회 단계"라는 주장에는 이견을 갖고 있다. 필자는 위에 곰과 범이 한 동굴에서 살았던 시대를 무리사회로 규정한 바 있다. 본인의 견해로는 환인은 천상의 존재로 상제신 위치이기 때문에 그는 환웅(천왕)과는 구별된다고 본다. 나중에 상제신 사상은 중국의 夏와 周 나라에서도 신의 위치로 국가를 세워주는 최고의 신이다. 고로 윤내현은 단군신화에서 환인(=神)의 존재를 간과하는 것 같다.

선사시대와 원시사회에 나타난 무리사회, 마을사회, 고을나라와 국가의 4단계는 요하유역의 고조선 문명의 형성지요, 동시에 중국의 앙소문화, 용산문화와 시기를 같이 한다. 그럼 이런 원시사회의 마을과 국가는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 시기적으로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다고 본다.

단군사화 본문에서 『위서』는 ‘아사달’을 말하고, 『고기』는 ‘평양성’을 도읍지로 언급한다. 이런 두 도읍지는 동일한 지명인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두 도읍지는 동일한 곳으로 한반도 안의 지명으로 해석(삼국유사에서 일연과 이병도)

2)두 도읍이 다른 곳에 위치한다는 견해 - 윤내현은 만주 요동 지역 요령 본계시 ‘검독, (임금의 터)’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위서의 아사달은 단군조선 말기 또는 한사군 설치 이후 지금의 ‘평양’이라면, 고기의 평양성은 단군왕검 건국 초기의 요녕에 있던 ‘검독’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ㅁ백악산 아사달ㅁ은 ㅁ난하지역(북경근처)ㅁ ㅁ장당경ㅁ은 기원전 12세기 당시 기자 조선의 식민 영토로 인한 ㅁ대릉하ㅁ 천도(난하와 요하 사이 지역) 그리고 아사달은 한사군 설치 당시 지금의 평양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고조선의 영토 확장과 위축이라는 긴장관계에서 우리는 만주지역과 한반도를 폭넓게 보고 고조선의 지명들을 조심스럽게 고찰해야 할 것이다. 이런 지역에 자리잡고 살았던 만주족은 이주민이 아니라 그곳에 토착민으로 국가를 형성했던 조선족이었다.

이상과 같은 검토로 보아 최근 중국이 심양 요녕성 박물관을 확대 개관하면서 대대적으로 ‘요하문명전’을 소개한 데는 우리 고조선의 문명을 미리 선점하고자 하는 전략이 숨어있다고 본다.

 

3. 단군왕조(檀君王朝) 전통(傳統)의 문제

 

앞 단락에서 환웅천왕은 인간이 된 웅녀와 함께 결혼함으로써 나라의 기초를 ‘인간됨’과 ‘계약’ 관계에서 준비하였다. 이런 신적인 가정에서 출생한 단군왕검은 천손의 계보를 이어단군왕국을 건설한다. 그에 대한 단군사화 본문을 읽으면서 새로운 문제들을 찾아보고, 왕국전통과 영토전승이란 두 개의 큰 주제를 논의할 수 있겠다.

단군왕검과 단군이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천 오백년 동안 그곳에서 통치했고, 단군의 후계들이 통치하던 중 기원전 12세기경 주나라 호왕의 침공으로 장당경으로 천도했으며, 계속해서 어떤 정변으로 인해 단군의 후계 중 어느 한 단군이 아사달로 귀환하는 정치적인 변동이 있었다.

 

단군사화 주석 본문 : 『고기』 왕검은 요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이 되는 경인에(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 평양성에 도읍을 하고(都平壤城), 비로소 조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始稱朝鮮),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또는 금미달이라는 이곳에서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又今彌達御國一千五百年), 주나라 호왕이 즉위한 기묘에(周虎王卽位己卯),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封箕子於朝鮮),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壇君乃移於藏唐京),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나이가 1908세였다(壽一千九百八歲).

 

단군왕검은 중국 요 임금(기원전 2400년 경) 시대 단군(고조선) 왕국의 왕이 되었다. 이는 더 이상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 역사이다. 단군왕국은 중국의 용산문화 초기 또는 앙소문화 말기(기원전 5000-2500년), 고대 중동 앗카디안 제국(기원전 2350-2050년)과 동시대에 건국 하였다. 설령 중국의 요나라가 전설시대라 해도, 그를 계승했던 夏왕조(2050-1550년)는 용산문화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이미 하왕조 시대는 노예제 국가를 형성 하고 있었다. 이런 정치-사회 상황에서 [홍익인간] 통치이념은 민주적-인도적인 정신으로 평가 받을 수 있다. 단군왕검과 그의 후계 단군들은 환웅으로부터 桓因神, 上帝神에게서 홍익인간 정신을 받고 천손계를 형성하면서 영토를 넓혀 나갔다. 평양성,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아사달이라는 4개의 지명이 단군왕국의 영토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4개의 지명이 동일한 지역은 아니다. 서로 다른 시기와 시대에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런 지명의 위치는 어디였는가? 조선이란 국가가 한반도라면, 한반도 안의 지역이라 할 수 있지만, 조선이 만주 지역에 있다면, 그런 도읍지는 만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일연과 이병도는 지명들을 한반도 안에 국한 시켰지만, 현재 단군설화 연구자들은 한반도 지역설을 받아드리지 않는다. 이에 대한 논의는 한반도 밖의 만주 지역으로 옮겨져서 행해졌고, 결과가 나와 있기 때문에 필자는 최근의 결과를 근거로 내용을 전개하고자 한다.

『한단고기』와 『규원사화』에도 고조선의 왕 칭호로서 ‘단군’과 초대 단군의 명칭 왕검 (王儉)이 나온다. 이후 왕검의 후계자 단군들 부루(夫婁)에서 연나(延那) 2333년-1133년까지 ; 왕검 이후 연나는 기원전 1183경에 재위 11년을 다스렸다. 그러나 주나라 호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던 기원전 12세기에 (아마도 솔나(率那)-재위 88년, 1183-1095년 경) 연나와 솔나를 비롯한 단군들은 ‘장당경’으로 천도하였으며, 그 후 기원전 108년 경 고열가(古列加) 47대 단군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조선은 제1대 단군 ‘왕검’을 비롯해서 47대에 이르는 단군들이 나오고, 평양성(만주 요녕 부근 - 검독 儉凟) - 백악산 아사달(난하 북경근처 만리장성 접경지역) - 장당경(대릉하와 요하 사이) - 아사달(한반도 대동강 지금의 평양)로 도읍을 천도하는 정치적인 정변을 겪으면서 영토의 위축을 가져 왔다. 요하유역에서 요하문명을 일으켰던 왕검 조선이 만주의 서남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1500년간 다스렸지만, 기원전 12세기에 와서 난하와 요하 중간 지대 대릉하, 장당경으로 위축되어 요녕 서북쪽 가까이로 쫓겼던 역사이다.

한편 이른바 재야 사서(史書)에 대한 각성을 촉구한 사람은 현 단군학회 회장 이재원 교수이다. 이 교수는 지난 단군학 13호 논문에서 규원사화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면서 규원사화의 위서(僞書) 논란을 재고케 하는 역사적․문학적 가치를 서술하였다. 강대국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규원사화』 및 『한단고기』 저자들의 역사서술의 의식은 오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며 아울러 각종 단군사화를 다각적으로 검토하여 그 전통사상을 창조적으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4. 환인 상제신(桓因 上帝神)과 하은주(夏殷周)의 천사상(天思想)

 

고조선과 중국의 역사철학과 통치사상은 처음부터 출발이 달랐다. 삼황오제의 황제(黃帝)와 요(堯)는 무사(武士)로서 무력통일로 통치를 시작했다. 중국 역사책 상서(尙書)에 의하면, 周의 천사상은 우주삼라만상을 창조하고, 천지자연법칙을 운행하며, 인간사를 감시규제하는 절대신이다. 국가건국의 명령을 내린다. 주왕(周王)은 천명을 받고 천자(天子)가 된다. 그의 지배영역은 천하 전세계이다. 하늘아래 전 영역은 주왕의 영토(領土)이고, 거기 거주하는 모든 백성은 주왕의 신민(臣民)이다.

이런 천(天), 천명(天命), 천자(天子), 천하(天下)로 형성된 제왕사상과 중국위주의 세계관은 중국역대 군주(中國歷代君主)에게 전승된다. 기원전 1121년-770년까지 351년 동안 주나라는 이런 통치사상으로 주변을 위협했다. 이런 천명설은 하왕조(夏王朝,2050-1550년)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단군사화에 보면, 환웅, 상제신(上帝神) 천신(天神)은 지고신으로서 하늘에 군림하고, 땅위의 인간에게 혜택과 징벌을 내리는 자비와 심판을 주는 분이다. 인간은 제의와 기도로써 그에게 호소하고 도움을 청할 수 있다. 단군사화에 보면, 환인은 그의 아들과 대화하며, ㅁ홍익인간ㅁ이란 천명을 주고 통치권을 위임한다. 환웅은 천신의 아들(天子)로서 웅녀와 결혼한다. 천신과 인간의 약속이 성립된다.

따라서 중국의 천사상은 정치적-민족적이라면(국가단위), 단군사화의 천신은 우주적-보편적인 인도주의 사상을 나타낸다. 이런 사상은 구약 창세기 1:26-28의 하느님 형상의 인간이 하느님의 복을 받고 세상의 통치권을 위임 받는 것과 가깝다. 하느님(상제신)은 하늘에서 세상의 군왕들과 백성들을 동등하게 그의 신하로 여기며, 그들에게 통치권을 맡기는 분이다. 따라서 우리는 상제신의 신관을 가지고 중화주의 사상의 차이를 항구적으로 조정할 노력이 필요하다. 요순(堯舜) 시대가 다시 오기 전, 중국의 통치사상은 바뀌기 어렵다.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은 역사적으로 주(周)의 천명사상 노선과 다르지 않다. 그들이 정치적-무력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힘이 있어 보이지만, 우리는 단군사화의 홍익인간의 천명을 우주적-보편적으로 수행하는 민족으로서 우리조상들이 정착해 살았던 만주지역을 기억하고, 조선족에게 도움을 주는 행동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단군사화의 단군왕조와 그의 영토전승은 민족사의 출발(出發)이며, 우리 토대의 원광석(原鑛石)이기 때문이다.

 

 

V. 종합적 고찰(綜合的 考察)

 

요하문명(遼河文明)의 고조선 역사와 문화

 

우리는 앞에서 ㅁ요하문명 對 황하 문명의 역사적인 관계ㅁ에서 난하 대릉하와 요하 요령에 걸쳐 있는 선사 시대의 몽골인들의 유적지, ㅁ앙소 문화와 토템, 모권 지배 사회ㅁ, ㅁ용산 문화와 부권 사회ㅁ, ㅁ고을 나라와 국가 단계ㅁ, ㅁ단군 왕조 전통과 영토 전승ㅁ까지의 내용을 단군 조선(고조선)의 역사가 되는 일연의 단군사화(壇君史話)의 짧은 기록(대략 53절)을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서설과 문제제기 그리고 본론에서 보면, 이런 신화적 전설시대는 문명사적(文明史的)인 틀에서 고고학적인 유물, 특히 갑골상형문자(甲骨象形文字)-한문의 전단계의 역사-시대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단절되었기 때문에 망각 속으로 사라졌던 역사로 여겨져야만 했었다. 그럼에도 갑골문은 1899(1898)년 이후 출토됨으로 漢文時代 이전의 역사로 인정되었다. 이런 갑골상형문자는 선사시대와 가깝다. 하(夏)나라(기원전 2050 이후)에 갑골문이 이미 있었다면, 선사시대에도 부호문자(符號文字)는 의사전달의 매체 역할은 가능했을 것이다. 고고학적인 유물들과 함께 갑골상형문자와 가까웠던 고조선과 홍산문화(기원전 4000-2000년),그리고 고조선 성립기간의 하가점 하층(夏家店 下層, 2500-1500년) 문화, 우하량 문화(기원전 3500년경)는 중국의 앙소문화(기원전 5000-2500년)와 용산문화(기원전 2300-1800년경)와 기깝거나 동시대(同時代)이다.

지리적(地理的)으로 그리고 연대적(年代的)으로 고대 고조선은 만주(滿州)의 요하(遼河)를 중심으로 홍산문화와 우하량문화 그리고 하가점 하층 문화를 형성하면서 하은상(夏殷商) 나라의 조상이 되는 중국의 용산문화 보다 더 이른 요하문명(遼河文明)을 창조했다.

아직 고고학적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거나, 중국 측에 의해서 은닉되어 있다는 문제가 해결되면, 한문(漢文)과 중국문화(中國文化)에만 의존되어 왔던 고조선 문화는 고대 바빌론 보다 앞서 있던 수메르(기원전 3000년경, 2800-2700년, 수메르 복고시대 2050-1950년에 걸쳐 메소포타미아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최초의 고등문명을 세웠던 신국(神 國),사원 중심의 농경국가, 지도자는 왕, 제사장, 전쟁군주의 한 인격으로 갖춘 "위대한 인간"(Lugal)칭호를 가짐)와 상통한다고 볼수 있다.

역사적인 유물(歷史的 遺物)을 근거로 고찰하면, 고조선은 중국 황하문명과 다른 고조선 복식, 채색 질그릇, 비파형 동검, 세형동검, 석곽 돌무덤, 고인돌을 남겨 놓고 있다. 윤내현 교수에 의하면, 고조선은 요하 심양 근처 평양시 검독(儉瀆 : 현 본계시(本溪市)에 도읍을 정하고, 난하(북경 근처), 장당경 대릉하(난하와 요하 사이 지역), 그리고 아사달(지금의 평양)로 옮겼던 영토사를 설득력 있게 주장하였다. 이런 역사적인 증거는 단군설화 본문을 통해 서술되고 있다. 기원전 2333년을 전후해서 환웅천왕과 단군왕검의 시대가 중국 삼황오제와 요순우(堯舜禹) 시대와 동시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갑골문자(甲骨文字) 시대와 관련 된 석유(昔有 : 요임금 전후 황하 유역의 대홍수 재난을 말하는 옛이야기), 서자(庶子: 상대에는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없던 형제관계를 의미한다.),삼위태백(지리적으로 국가 영토 경계가 아니라, 인류의 거처, 중국에서 한반도를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 환웅천왕과 단군왕검에 나타난 왕(王)칭호는 갑골문자로 높은 지위를 갖춘 왕의 위엄을 표하는 삼각형 또는 깃털을 꽂은 모자(관 冠)를 상징하는 갑골문자들이다.. 위에서 고찰한 것을 정리하면, 고조선은 요하와 황하 강을 중심으로 중화민족의 조상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각자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교류하고, 충돌하는 역사를 경험하고 공통된 발전 단계에서 고등문명을 이룩했던 것 같다.

 

요 임금과 동시대라면, 고조선 건국 전후에 해마다 거듭되는 대홍수 재난은 엄청난 피해를 주었을 것이다. 이런 대홍수가 있던 때(昔有), 환웅은 낮은 벌판에 사는 주민들을 살리려는 마음을 갖고(貪求人世), 높은 지대를 찾아(三危太伯),그곳으로 인간을 구출했던(弘益人間) 치적을 세웠던 역사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요순우 임금들의 치산치수(治山治水)와 병행되는 현상이다.

좌우간 지금까지 홍익인간 통치사상을 거듭되는 대홍수재난 앞에서 신(神,上帝,桓因)에게 간구하는 서자환웅(庶子桓雄, 상제신의 여러 아들들)의 홍익인간 통치사상으로 재해석(再解釋)할 필요가 있음을 제안한다. 그리고 고조선은 역사초부터 중국과 다른 신중심의 역사를 가지고 곰과 호랑이의 토템 종교를 극복했고, 중국의 천자와 무력통일의 정치가 아니었다. 고조선은 정치의 최상의 목적은 “인간됨”에 있었다. 그래서 인간이 된 곰과 웅녀는 고조선 국가를 이루지만, 인간 보다 공격적인 인간은 중구의 정치성향을 신화로 암시하는 것 같다.

단군사화는 내용적으로 두 종류의 역사를 가진다. 하나는 선사시대(환웅과 웅녀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의 왕조와 통사적(通史的)인 역사를 가진다. 선사시대의 역사는 역사연대(고조선 연대)가 아니고, 고고학적 시대(古考學的 時代)의 연대(年代)를 사용한다. 중국역사는 이런 시대를 전설시대 속에 넣고 있다. 고조선 건국 이전 시대는 중국의 앙소문화와 용산문화로 불리운다. 즉 신석기 초기와 후기 그리고 청동기 시대까지 내려 볼 수 있다. 그에 대한 중국고대 문헌(여씨춘추-시군람 등 앞에 나옴) 전승이 있다.

그 다음 중국과의 통사적 역사는 단군왕검이 요임금과 동시대에 출발하는 데서 그 거점을 잡게 된다. 단군고기에 나오는 위서, 당배구전, 통전은 저술적 위치가 중국 왕들의 역사 본기(本紀)와는 급수가 낮게 편찬된 전승이다. 즉 중국 통치자 아래 제후들의 개인이나 집단으로 취급되는 편찬이다. 이런 문헌 전승으로써 국가 왕조역사(王朝歷史)의 합법성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군사화 내용에 보면, 주왕조(周王朝)가 난하지역(현 북경근처)에 기자조선을 식민영토로 침공했던 역사, 그 다음 서한(西漢)이 대릉하와 요하(大凌河와 遼河) 사이를 침공해서 한삼군(漢三郡)을 설치했던 역사는 제후국 보다는 이민족의 적국(異民族의 敵國) 관계를 서술한다. 단군조선의 비극적인 영토축소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이어서 왕검(王儉)은 단군조선의 초대 왕의 고유명칭이다. 그는 평양성(만주 요령 부근 검독(儉瀆, 임금의 터)에 도읍을 정하고, 백악산 아사달(北京近處)로 옮기고, 그의 후계자들(壇君)들은-부루, 가륵 이후 연나까지- 장당경으로 쫓긴다. 마지막 47대 단군 고열가(古列加)는 아사달(지금의 평양)로 은신한다. 단군조선은 1500년간 남만주 요령에서 북경접경 지역을 통치하다가 기원전 12세기 이후는 대릉하 지역을 경계로 축소되었고, 마지막에는 요하지역(요령)을 경계로 축소되어 도읍을 아사달(현 평양)로 정하고 고구려가 요동 요하를 국경(國境)으로 건국 할 때까지 통치를 유지했던 것 같다.

단군조선은 중국 요나라부터 서한까지의 역사적인 통치 기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그러나 단군사화 기록에 여러 지명(地名)들의 혼란으로 한반도설과 만주지역설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이유는 중국이라는 강대국과의 정치적인 예속문제가 있었다는 점이다. 만주지역의 지명을 한반도의 지명으로 둔갑시켰던 왜곡의 역사이다. 그 다음은 일본의 개입이었다. 단군의 역사를 전설 등으로 변질시켜 역사의식을 포기하고 종교적인 의식으로만 집중케 했던 정책이었다. 따라서 중국사대 문화는 단군역사를 한반도 중심으로 환치시켰고, 일본교육은 역사적 사실을 무속적 종교세계로 변질시켰다.

동양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중국문헌 속에서 고조선 단군조선의 역사적인 존재를 찾아내면서부터, 단군조선의 한반도설은 만주지역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런 만주설은 아직도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하고, 학문적인 영역에서의 가능성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정도이다. 문제는 학자나 일부 정치인들 보다는 53절에 불과한 짧은 단군사화의 문학적 전승이 제왕운기, 규원사화, 응제시주와 세종지리지와 함께 국민적인 관심을 끌게 하는 것이다.

단군왕검과 단군 왕조는 고구려, 발해, 백제, 신라, 고려와 조선의 건국의 정당함과 합법성을 인정케 했던 한민족의 국가전통傳統)으로 전승(傳承)되어 왔다. 홍익인간(弘益人間) 통치이념은 환웅의 대명사로서 전설시대의 중국의 무력적 정복전통(征服傳統)과는 대조적이며 인도적, 민주적 사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왕검은 제1대 단군의 고유명사이며, 지명들과 함께 등장하는 단군들은 47대에 걸친 단군왕조의 제왕들을 대표한다. 이런 압축된 내용들은 중국의 역사서와 고고학적인 유물들로 보완되며, 때로는 수정을 거쳐 정리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다. 마지막으로 단군조선의 국가전통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위한 논리로서 윤내현 교수는 단군 은 중국의 천자 (天子)와 동격(同格)을 말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문헌과 연구성과 그리고 현지유적 탐방 등을 통해 두 개의 우리 고조선사, 즉 榮華의 역사(기원전 2333년-1200년 주의 기자 책봉 전 까지)와 고난(苦難)의 역사(周의 기자 조선 이후) 등을 파악했다. 이제 우리는 요하 문명(遼河文明: 남만주 지역 일대와 요동반도 및 북만주지역)의 고조선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시급하다.

 

 

 

 

 

 

 

 

 

 

 

 

Abstract

 

Prof. Dr. Pang,suk-chong

(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in Seoul)

 

Title : Yoha-civilization and civilized observation on the Ancient Chosuns History,

Yoha-civilization in Dangun Epic(Tale)

 

For the thesisses use I the methods of the historical-critical research. The table of contents is following : I. Introduction, II. problems and the methodology : 1. semantic analysis : seok-yoo(there was a great flood or at that time of the flood), seo-ja(several sons of the god "sang-je", sam-wi( geographical mountain in the near of kam-sook 甘肅 ), cheon-wang(heavenly king), "pung-baek,woo-sa,woon-sa" three wings, ministerial-military charismatic general. 2. analysis of sentnences and technical terminology, 3. literal parallelism of the great flood-events in the past, 4.literary-form criticism and Sitz im Leben, 5. result

III. Cultural observation on the Dangun Epic(Tale), 1. totemism of Bear and Tiger and culture of Angso 仰 韶, 2. marriage of Woong-nyeo(feme) with Hwan-woong and culture of Yongsan 龍 山

IV. Territorial-historical observation on the ancient Cho-sun, 1. problem of traditional territory in the period of ancient Cho-sun, 2. historical relationships between ancient Cho-sun and China : "Yoha-civilization vs Hwangha-civilization", 3.problem of the tradition of dynasty Dangun. 4. Hwan-in as highest god, sang-je and Heavens thought of dynasty "Ha,Eun,Joo 夏殷周“

V. Synthetic observation

 

Investigate we in the introduction, bringing forward of the problems and main discourse,find we a mythical and legend period in the frame of cultural history. Such periods belong to the prehistorical generations, that's especially kap-gol hieroglyph 甲骨像形文字. These letters were former stage of the chinese classics and compositions, but they were been breaking and hidden historically in the rapture, amnesia. In the 1899 were they for the first time found at Eun-hur in china. Kap-gol hieroglyph was used perhaps certainly in dynasty Ha 夏 -since 2050-in the same time of the Ancient Cho-sun(B.C. 2333).

With archeological relics and remains of prehistoric ages(generations) know we Hong-San culture 紅 山 文 化 (B.C. 4000-2000) and Woo-ha-Rhyrang culture 牛 河 粱 ( B.C. 3500), Ha-ga-cheom under stage culture 夏家店下層文化(B.C. 2500-1500) in the southern Manchu (南滿州). These cultures were belonged historically to the Chronology of Ancient Cho-sun. Their historical proofs are following : 1. dress designs, 2. varigated colors, 3. unglazed earthen ware, 4. lute-form copper sword, 5. more delicate copper sword, 6. stone outer-coffin, stone coffin and 7. tomb covered with big flat board-stone etc.

These things are sustantially different from chineses. The ancient Cho-sun created early their cultures in the wide territorial lands of southern-northern Manchu.

This is so called "Civilization of Yo-Ha 遼 河 " If the c

요하문명과 고조선 역사의 문명사적 고찰(考察)

 

-단군사화(史話) 본문의 역사비평적 해석-

 

방석종(方錫淙)

前 감리교 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목 차

 

I. 서설

 

II. 문제제기와 방법론

 

1. 어의론적 분석: 석유(昔有), 서자(庶子), 삼위(三危),

환웅천왕(桓雄天王),단군왕검(檀君王儉)의 王 칭호,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 환인의 품성과 행위

2. 석유환인-삼위태백-홍익인간의 구문적 분석

3. 대홍수 재난 문학의 평행(Parallel)

4. 양식사적 비평과 삶의 자리

5. 결과

 

III. 단군설화 본문의 문화사적인 고찰

 

고조선의 홍산문화(紅山文化)와 중국의 앙소/용산문화

1. 곰과 호랑이 토템과 앙소문화

2. 웅녀의 결혼과 용산문화

 

IV. 고조선의 영토사적인 고찰

 

1. 고조선 영토전승의 문제

2. 요하문명 대(對) 황하문명의 역사적인 관계

3. 단군왕조 전통의 문제

4. 환인 상제신과 하은주의 천사상(天思想)

 

V. 종합적 고찰(綜合的 考察)

 

 

I. 서설

 

필자는 단군설화(사화) 연구를 위해 일차적으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史)에 실려 있는 고조선(古朝鮮) 역사 본문을 가지고 그의 시대와 문명을 폭넓게 보고 단군사화 본문을 개별적으로 주석하려고 한다. 문화사적으로 단군사화는 그의 연대 기원전 2333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사시대(先史時代)또는 원시시대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단군사화는 이런 시대적인 배경과 연결되어 본문(本文)이 주석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단군사화는 그의 역사적인 자료와 증거물이 충분치 못한 가운데 몇몇 사서(史書)의 인용(위서, 고기, 당배구전, 통전 등)으로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역사서는 후대의 편찬 된 내용들이라, 단군사화 본문의 내용과는 거리가 멀리 있는 후대의 창작물이라는 의심도 받는다. 특히 역사적으로는 전설시대(傳說時代)라는 틀에서 기록을 보아야하기 때문에 환인 상제신 옆에, 환웅(桓雄)과 웅녀(熊女)라는 인물은 역사적으로 말하기는 불가하지만, 수렵과 농경사회, 씨족사회의 형성은 신석기(新石器) 시대와 청동기 시대로 이행되었던 인류문명의 발전단계와 원시국가(原始國家) 성립과정을 반영(反映) 하고 있다.

일찍이 중국은 전설시대의 하왕조(기원전 2050-1550년 추정)나 상왕조(기원전 1800-1100년 추정)를 상서,시경, 죽서기년, 사기 등에 기록해 놓았다. 이런 전설시대는 중원과 황하를 중심했던 선사시대의 앙소문화(기원전 5000-3000년 또는 5000-2500년)와 용산문화(기원전 2800-2000년 또는 2300년-1800년 추정)를 근거로 했던 시대로 정리해 놓았다. 중국의 하은상(夏殷商)나라는 공통적으로 용산문화(龍山文化) 이후(以後)에 등장하였다.

그렇다면 단군왕조는 중국의 용산문화 기간에 건국되었던 국가이었다. 그는 중국의 고대 전설국가 보다 근 300년 먼저 세워졌던 역사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고조선은 문명사적으로 홍산문화(紅山文化,기원전 4000년-2000년)라는 독립된 문화를 발전시켰다. 우하량 문화(기원전 3500년 추정)도 발견되었다. 고조선 성립은 하가점 하층문화(기원전 2500년-1500년) 기간이었다. 고조선 문화는 현재까지 주로 고고학적인 출토물들 예를 들면, 고조선 복식, 채색 질그릇(적,백,황,흑색),비파형 동검, 세형동검과 석곽묘, 고인돌 등의 높은 수준의 예술 조형물 연구에 집중되어 있을 뿐이요, 그의 시대적인 상황이나 정치적인 현상이 중국의 역사기록물만큼 준비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단군사화 본문에 나타난 정치사회상들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고조선의 홍산문화 틀 속에 우하량(牛河梁)의 여신(女神) 종교와 하가점 하층문화(또는 豊下文化) 기간의 고조선 건국을 받아드리면서도, 중국의 앙소문화와 용산문화에 나타난 원시사회 성립과 발전과정들을 전제로해서 단군사화의 본문을 주석할 것이다.

 

 

II. 문제제기와 방법론(問題提起와 方法論)

 

중국 앙소와 용산 양 원시-선사문화와 독립적으로 비슷한 시대에 난하/대릉하와 요하 유역을 중심해서 발전 되었던 홍산문화 틀 속에 우하량 문화(기원전 3500년경)와 하가점 하층 문화 (기원전 2500-1500년)는 단군 고조선 국가를 형성케 했다(기원전 2333년경). 시대적으로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요(堯)임금과 동시대적이었다. 이것은 위서(魏書)의 내용이다.

그런데 고기(古記)에는 그보다 더 오래된 환웅시대를 ㅁ석유 昔有 옛날ㅁ에라는 설화문 도입구로 시작하고 있다. 이런 문구는 계속해서 서자환웅 수의천하(數意千下) 탐구인세 하시삼위태백(貪求人世 下視三危太伯) 가이홍익인간(可以弘益人間)이라는 4자 또는 6자 성어(成語)로 서술되고 있다.

문제는 옛날은 어느 때 어떤 시기였는가? 삼위태백은 위치가 어디였는가? 환웅이 인간을 위해서 홍익인간을 갈망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상황에서 환웅은 인간을 위해 지대가 높은 산들을 찾았는가? 환인(桓因)과 환웅(桓雄)은 부자관계이지만, 그들의 역할과 존재위치는 어떻게 구별 되는가? 그 다음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이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에서 곰과 범의 토템동물은 원시사회-선사시대에서 어느 문화에 속한 것인가? 이들이 동물에서 인간화를 원하는 과정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그리고 熊女者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여자가 된 곰은 더불어 혼인할 자가 없으므로 매번 단수 아래에서 잉태케 해달라고 빌었다)에서 여인의 적극적인 결혼의지와 모권적(母權的)인 분위기를 감지케 하는 것은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환웅은 잠시[사람으로]변하여 그와 혼인하니)로 이어지면서 모계가 부계(父系)로 옮겨지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토템종교 사회에서 인간중심으로 발전되는 과정 그리고 여인 중심의 모권적인 사회가 얼마 동안 지속되다가 부권사회로 옮겨져 일부일처제의 가정을 형성하는 배경을 말하고 있다. 특히 웅녀와 환웅의 결혼과 단군왕검의 탄생은 천손계(天孫系)의 왕조(王朝)를 천명하는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일련의 원시-선사시대의 발전과정은 어떤 문화사적인 배경에서 형성되었으며, 그런 선사시대를 어떻게 추적해 낼 수 있을까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여기에 단군설화 본문 해석의 방법론적인 기술이 요청된다. 첫째로 어의분석(Semantische Analyse)이고, 둘째로 문학적-전승사적(傳承史的)인 비평방법이요, 마지막으로 동기와 전통비평(動機와 傳統批評)이다. 이런 방법론을 적용하여 위에 언급된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1. 어의론적 분석(semantische Analyse,語意論的 分析)

 

필자는 위에서 단군설화의 시대적인 배경을 문제 삼고, 설화본문을 역사적-문화사적인 맥락으로 거슬러 올라가 가장 가깝게 일치하는 의미를 모색하는 해석 작업을 제안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단군설화 본문을 역사적-문학적 또는 문자적으로 해석한 연구서를 많이 접했고, 계속해서 접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반 한문(漢文)의 사전적인 어의(語意)와 색인사전의 용례(用例)로 만족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군설화 본문에서 특이한 어문적-어휘적인 조형(造形)을 본다. 이를테면, 석유, 서자, 삼위태백, 환웅천왕, 단군왕검 등인데, 이들은 일반 부사용법, 일반명사(석유, 서자)로만 이해하기에는 간단하지 않은 것 같다. 고유지명(삼위태백)은 하나의 지명인지, 두 개의 지명의 결합인지 지리상의 사실로는 낯선 것이다. 그리고 고대 또는 선사시대의 배경에서 환웅천왕과 단군왕검은 통치자의 칭호로서 “왕(王 )을 가지고 있다. 인류는 어느 시대부터 왕(王 ) 칭호를 사용했던 것인가? 이런 어휘들의 어의는 지금까지 별로 크게 문제되지 않고 그냥 포괄적인(총론적인) 의미로 넘겨져 왔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 구문상의 단어들이 특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있다면, 그들은 해석 작업에서 어휘(단어)의 의미 분광(독일어로 Das Bedeutungsspektrum), 즉 단군설화 본문의 동시대 상황과 작품들을 신중하게 끌어들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어휘에 대해서 동시대적(同(共)時代的,synchrone Betrachtung)인 고찰이 요청된다. 그러나 우리는 단군설화가 문서로 작성 된 이후 전승(傳承) 단계에서 다양한 여러시대의 손을 거친 것은 아닌가 의심하면서 연대기적인 고찰(diachrone Betrachtung)에 머물러 단군설화 본문의 시초 또는 그 설화의 직접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있지 않은가를 성찰(省察)할 필요가 있겠다. 단군설화 본문의 어휘들이 사실상 확정된 또는 임시적인 의미의 지식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어의적인 분석은 아직도 본문의 내용의 구명(究明)을 전할 수 없다. 어의분석은 그 결과가 온전히 나올 때까지 반복해서 검토되고, 재검사로써 증명되고, 교정되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부정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다의적(多意的)인 어휘 가운데서 적합한 의미를 찾아보려고 의미분광(Das Bedeutungsspektrum, 意味分光) 방법을 사용한다.

 

단군설화 고기(古記) 첫머리는 석유환인으로 시작한다. "옛날에 환인...구하였다"에서 昔에 대해서 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어 한문(漢文)과 갑골상형 문자 측면에서 논하고자 한다.

 

1) 석(昔) : 고기에 의하면 ㅁ석유(昔有), 시유(時有)ㅁ라는 부사적인 표현은 “옛날에, 당시에 ... 있었다”로 해석된다. 예를 들면, 時有六書(당시에 육서가 있었다.) 고래(古來)는 옛날 이래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단군설화 고기(古記) 첫머리에 ㅁ석유(昔有)ㅁ를 단순히 "옛날에 ... 있었다"로 해석했고 아무런 문제가 없이 넘어갔었다.

그러나 단군신화의 배경이 신석기 시대 앙소와 용산문화 또는 홍산문화였다면, 그런 시대에 사용되었던 문자(文字)는 어떤 것이며, 그런 문자는 무슨 뜻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물을 수 있다. 단군설화가 기원후 13세기 고려 일연에 의해 최종 편집되어 전승된 설화이지만, 기원전 2333년 단군왕국이 건설되었다면, 설화의 시대는 선사시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의 역사적인 문화와 연결된다면, 은상대(殷商代)에는 갑골상형문(甲骨象形文)이 사용되었으며, 설화 본문의 한문(周代의 金文,秦代의 小篆, 宋代의 楷書의 사용)은 적어도 갑골문의 원의(原意)에 따라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한문(漢文)의 표기를 갑골문의 어원을 찾아 해석할 수 있는 한,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한문 안에 숨겨진 갑골상형문자의 진의(眞意)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은상대의 갑골문은 은허 지구에 묻혀 있다가 1899년에야 발굴되어 현재 갑골문 연구는 100년 안팎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장애가 되는 것은 단군설화의 본문을 한문과 함께 그의 구체적인 역사배경과 관계없이, 설화가 최종편집 되었던 저자시대에 국한해서 보려는 데 있다. 그러나 필자는 단군설화의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실제적으로 인정하여, 중국의 문헌에 따라 고조선 시대와 동시대가 되는 문화사적인 배경, 즉 앙소/용산문화와 홍산문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설화가 간직한 문학의 본문을 분석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군왕검과 요(堯) 임금이 기원전 24세기의 인물이라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앙소문화 후반과 용산문화 시기의 특징을 문헌에 따라 구별해 보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그 시대와 가장 가깝던 문자 갑골상형문(대체로 기원전 16 세기경 사용)에 따라 갑골문 언어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를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설화 본문 고기의 첫머리에 부사적인 용법 석유(昔有)를 해석하는 문제이다. 갑골문의 ㅁ석 昔ㅁ은 그림이 아닌 상형(象形)이다. 3줄기의 물결이 태양 위에 또는 그 아래 있다. 중국인 엽옥삼(葉玉森)은 석의 윗부분 災의 고자(古字), 아래부분 일(日)과의 결합형태를 보고 홍수(洪水)가 난 날이라는 뜻을 취하여, 석(昔)자로 해석했다. 허진웅은 "商 나라 사람은 홍수의 지닌날을 석 昔으로 표시하였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 참고할만한 자료는 陳煒愖 저, 『甲骨文導論』,이규갑외 공역, 2002년, 학고방, 139-140,가로와 세로의 3겹 물결형상은 홍수재난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재난으로 인신(引伸)되었다. 이런 3겹 물결과 그의 위 아래에 위치한 태양 모양을 결합한 상현문 昔은 홍수재난의 의미를 나타내는 지난 과거를 이야기 한다.

그 밖에 바빌론 세계창조 모형을 보면, 둥근 원형의 상반부는 3층의 하늘 대양이 있고, 맨 아래 지름부분에는 하늘대양 아래 위치한 태양이 동에서 서로 운행하는 그림이 나온다. 문자로 표현하면, 갑골문 昔의 형상과 일치하는 3겹 물결 아래 태양의 위치와 동일하다. 고대 바빌론인의 창조세계와 중국의 홍수재난의 형상이 동일한 것이 흥미롭다.

 

2) 서자(庶子) 해석 문제 :

단군설화 고기를 보면, 昔有桓因 庶子桓雄에서 ㅁ서자 庶子ㅁ는 적자 옆에 첩의 아들이거나 나라의 벼슬, 직함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갑골문에서 庶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아직도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어떤 개연성이 있는 해석이 흥미롭다. 손예철은 갑골문의 유화(類化)현상에서 庶의 분석과정을 지적하는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허신이라는 중국 갑골문 학자가 庶자의 자형에 대해서, 爲古文光字라고 하면서 庶를 光으로 해석했던 일이다. 그러나 高 明 편, 『고문자류편』, 398쪽을 보면, 손예철의 비평적인 지적이 맞는다. 허신의 해석은 오류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서자(庶子)는 사전적으로 적어도 3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금문상용자전(金文常用字典)』에 따르면, 서자는 1. 갑골문자로 서(庶)는 음식을 익혀먹는 불에 달군 조약돌을 말한다, 2. 고유지명으로서 서(庶)란 곳이 있다, 3. 관직(官職)으로 서자부가 있다. 주나라 시대 천자가 설치했던 고위직이다. 행정 관료를 임명하였다. 윤리도덕 교육을 관장하는 직책이다. 부모에게 효도, 형제들의 우애를 돈독히 하며, 인도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교육이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단군설화의 고기에 나오는 서자(庶子)는 중국의 하상주(夏商周) 나라 보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또는 동시대적인 문자 갑골문과 관련은 되지만, 금문상용자전의 어휘에 맞추는 것보다는 선사시대 상대(商代)의 인습(因習)에 가까운 의미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상대에는 한 아버지의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없이 한 형제들의 의미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왕위(王位)도 처음에는 형제상속이었다. 단군설화 고기에 부지자의(父知子意),즉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라는 문장에서 서자는 아들로 언급되고 있지 않은가? 환웅은 장자가 아닌 차자(次子)로서 환인 아버지 곁을 떠나 나라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3) 왕(王) : 단군설화 고기에 왕 칭호(王稱號)는 환웅천왕(王)과 단군왕검(王儉)에서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왕은 이미 상대(商代)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 중동에서는 기원전 5000년부터 왕국이 건설되어 왕의 통치역사가 있었다. 역사적인 시기 이전부터 왕(王) 칭호는 정치-종교적인 지도자에게 붙여졌던 칭호이다.

고대 국가와 현대 국가개념과 좀 규모가 작은 도시국가와 부족연맹체의 지도자가 왕으로 불러졌다(예. 이스라엘 사사시대에 부족연맹에 세겜도시의 왕 아비멜렉 왕). 아마도 고대 고조선 환웅도 이런 의미에서 제사장 왕으로 칭호를 받은 3000명 무리의 지도자였을 것이다. 특히 환인에게 받은 천부인 3개(거울, 칼과 모자 관(冠) 중 환웅이 머리에 쓴 관(冠)은 갑골상형문자의 “왕” (갑골문)을 의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모자는 삼각형 모형과 깃털로 장식한 모자에 대해서는 최남선(崔南善, 「단군고기잔석」, 『단군신화연구』(이은봉 편),온누리, 1986,p.24를 보라)이 이미 말한 바이다.

역사적으로 일찍이 기원전 3000년 초기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는 고등문명을 이룩했던 신정국가인데, 그의 왕은 설형문자로 군왕표시를 갑골상형문자 왕( 王 )과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한문(漢文)보다 먼저 있던 갑골상형문자를 통해서 동시대적인 관점(同時代的 觀點)으로 단군설화의 왕(王)칭호를 볼 수 있겠다.

하여간 한문화(漢文化) 된 단군설화 본문을 선사시대 배경 아래서 갑골문의 어의를 찾아 좀더 시간을 가지고 연구 조사하면, 지금까지의 이해했던 것이 전혀 다르게 해석될 가능성이 있으며, 상상과 추측으로 해석했던 것이 실증적으로 설득력 있게 그리고 과학적으로 해명될 날이 올 것이라 기대된다.

홍산문화(紅山文化) 유적에서 발굴된 채색도기에 새겨진 부호문자나 그 시대와 관계된 갑골문과 같은 문자를 구체적으로 탐구하여 고고학적인 유물과 문학을 병행해서 문서내용을 해석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4) 삼위태백(三危太伯) : 삼위(三危)는 고유명사 지명(地名) 또는 추상명사로서 3가지 위험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삼위는 중국 서쪽 변방 돈황 남쪽 산 이름으로 나온다(書經,淮南子). 산둘레 100리로 鳥鼠山이다(山海經). 융인(戎人)이 말하는 세 봉우리의 산을 말한다(尙書). 현재는 ㅁ감숙(甘肅)ㅁ 지역 어딘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는 태백과 결합되어 있다. 지역적으로 중국과 한반도에 걸쳐 있는 광활한 영토이다.

아직 국가영토적인 개념 보다는 인간 거주공간을 말하는 것 같다. 구약 창세기 8:4-21에서 홍수 후에 노아는 아르메니아 아라랏 산 정상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리는 이야기와 비교 된다. 대홍수를 피해 높은 산으로 올라와 제사를 드리는 종교행위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 추측에 따르면 다른 한편 삼위는 태백 고유지명을 수식하는 형용사가 되어 3가지 위험과 재난들, 즉 홍수, 화재와 전쟁(역병)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런 대재난이 반복되는 위험 속에 있는 태백 높은 산을 말 할 수 도 있다.

고대 선사시대의 중국 중원의 황하문명 지역의 대 홍수재난과 북만주 난하, 대릉하와 요하 강 유역에 발생하는 홍수재난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해마다 거듭되는 셀 수 없이 많던 홍수로 인하여 국가는 수도를 여러 번 옮겨야 할 정도였다. 역사적으로 상(商)은 홍수로 인하여 13번이나 천도했던 적이 있었다. 요나라 시대에는 홍수가 중국 전토에 범람하기도 했다. 따라서 홍수재난을 전후해서 높은 지대로 사람을 구출하는 지도자들의 치산치수(治山治水)의 세상통치를 ㅁ석유(昔有)-서자(庶子)-삼위(三危)ㅁ라는 어휘의 병렬에서 감지할 수 있다.

 

5)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단군설화 본문에서 "환웅은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 그는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을 맡아서 관장하고, 세상에 머물러 다스리며 교화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문장을 분석해 보면, 환웅은 무리(또는鬼), 3익(三翼), 5부(五部)와 세상인(백성, 百姓)을 거느리고 다스린다. 3000명의 무리는 어떤 부류들인가? 풍백, 우사와 운사는 누구인가? 그리고 5부의 행정(行政)은 누가 맡는가? 백성들은 얼마나 되며 어디에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환웅천왕의 왕권을 위해서 대답되어야 할 것이다. 천왕(天王)은 3000명 무리,3익과 백성통치에서 그의 왕권(王權)을 천명하고 있다. 태백산 정상과 신시(神市)는 그의 영토의 중심지로 정해졌다. 그의 아버지 환인 상제신이 주신 땅이다. 그리고 그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이미 살고 있었다. 이럼으로써 1.환웅천왕의 왕권, 2. 땅, 통치 영역, 3.백성이 왕국존재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증명한다. 그러나 문제는 3000명과 “풍백, 우사, 운사” 3익은 어떤 존재들인가? 그들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그의 정치적-종교적 또는 사회적인 배경이 궁금하다. 환웅천왕은 제정일치 신정국가(神政國家)의 최고 지도자이라면, 왕 주변에 측근들과 국가적 직무를 담당하는 계층이 준비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최우선은 국가 산업과 방위(防衛)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이미 국가들이 출현했던 역사를 익숙하게 알고 있다. 이미 기원전 3000년경부터 고대 왕국이 형성되고 왕이 전쟁을 통해 노예제도와 경제사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우리는 그런 의미의 왕(갑골 상형문자 ,王)을 알고 있다. 이런 왕의 측근에는 귀족과 전쟁을 위한 군대(軍隊)와 장군들이 직제(職制)를 맡았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풍백,우사와 운사를 문자적(文字的)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런 3 가지 칭호가 종교적인 신적인 존재로 해석도 되겠지만, 다른 한편 환웅천왕의 나라를 위해 3 칭호는 정치적인 직제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논할 필요가 있다. 우선 역사적인 자료를 가지고 3 가지 칭호와 비교되는 배경을 찾아내는 일이다. 단군설화가 기원전 2333년 전후 중국 요순우 시대와 하은주(夏殷周) 시대와 밀접한 역사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전제(前提)에서 문제를 풀어 보겠다.

은(殷) 시대에 왕권 아래 부자후백(婦子候伯) 등 근친 귀족이 있어 왕을 보좌했던 역사가 있다. 중국 상서(尙書),반경편(盤庚篇)에는 百執事가 나오고, 西周의 大盂鼎에는 殷正百辟이라고 했는 데 백관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예기와 곡례에는 六大와 오관(五官)이 나온다. 정현(鄭玄)은 주(注)에서 이것을 은제(殷制)라고 했다. 특히 풍백에서 백(伯)은 그 뒤에 나오는 우사,운사(雨師,雲師)와 구별되는 관직 같으나 . 여기서 사(師)는 백(伯)과 군대를 지휘하는 관직 같다. 그리고 오관(五官)도 주곡주, 명주, 병주, 형주, 선악 5가지 관장 업무와 비교 된다고 하겠다.

그럼 무리 3000명과 풍백, 우사, 운사(군사령관들)의 관계를 살펴 보자. 군대편제에서 10진을 주요 단위로 삼은 단위가 있었다(기층단위 10명 소대, 차례로 100,500,1000,3000...). 주나라가 상을 멸망시켰던 때는 1사(一師)가 5000명이었다. 상대(商代) 군대편제는 복사(卜辭)에서 등부호삼천(登婦 好三千)이란 기록이 있다. 비교적 큰 제후국에서는 군사가 3000 이상이었다. 복사에는 또 [왕께서 삼사(三師)를 만드시니, 우중좌(右中左)이다. 왕작 삼사 우중좌(王作 三師 右中左).

단군설화에서 환웅천왕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을 맡은 일은 은나라의 은제(殷制)에 나오는 백과 사(伯과 師)의 칭호를 가진 3 명의 군사령관과 비교되며, 왕이 전시(戰時)에 출동시키는 3000명의 병력 그리고 평상시 백성을 관장하는 5부(部)는 하와 은 나라의 5 관(官)과 비교된다. 누가 누구에게 이런 관직을 전해 주었는가하는 문제는 현재로서 밝히기는 어렵지만, 기원전 2000년 전후 왕검조선과 중국의 하은주는 요하 유역과 황하 유역에서 서로 교류하면서 공통된 국가제도의 관직을 설정한 것만은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서로의 국가 영토가 어떻게 경계 지어져 있었는지의 문제보다는 갑골문자로 기록된 복사의 내용으로 전승된 정치사회와 종교의 내용들이 크게 관심을 끌고 있다. 문서 전승이 매우 부족한 단군설화 배경 연구는 아마도 그와 가깝거나 동시대의 역사와 비교를 통해서 단군설화 내용의 역사성을 설득력 있게 증명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단군설화는 결코 왜곡된 문서나 후대의 상상이 추가된 부가물(附加物)이 아닐 것이다. 고대의 미미한 것을 과장한 것이 아니라, 실재 있었던 것을 그대로 복원하여 그의 위상(位相)을 밝히는 작업일 것이다.

부설(附說: Exkurs): 상대인(商代人)의 갑골복사에 나타난 상제(上帝)는 창조영역에서 해, 달, 별, 바람, 구름, 벼락과 천동 그리고 비를 제사(帝使),제신(帝臣)으로 부린다. 그리고 그는 특히 바람, 구름, 벼락과 비를 농산물 수확, 가뭄과 풍요로 관장한다. 이런 창조 영역의 징조들은 신격화 되어 기능적인 신(機能神)으로 해석 된다. 이들은 신석기 시대 농경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농산물의 풍요 또는 재앙의 세력(Ambivalenz : 동일한 대상에 대한 반대 감정의 양립(병존) )으로 신성시 되었다. 일차적으로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신격화 하여 풍신(風神),우신(雨神),운신(雲神)으로 해석한 작업이 있다. 이은봉은 1) 운신(雲神)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요점만 취해 보면, 구름은 은(殷) 나라에서 화(禍)를 가져오는 영수(靈獸) 용(龍)의 형태로서 신성한 신의 뜻이며, 신위(神威)를 나타낸다고 했다. 2) 우신(雨神)은 장마와 홍수 재난과 화(禍)를 가져오는 위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3) 풍신(風神)은 상제의 직접적인 사자 역을 담당하고, 자유자제로 사방 각지를 다니며, 상제의 명령을 전달한다. 상제의 대리자로서 사정관(司政官) 역할을 수행한다. 상제의 의지를 전한다. 이은봉은 이런 3 신의 기능을 매우 유익하고 가치 있게 해설하고 있다. 3 신 기능의 공통점은 각자 위력을 가지고 구원의 역할을 하지만, 적수에게는 禍를 가져온다. 그리고 상제신의 의지를 전하며, 그의 직접적인 사정관(사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은봉은 환웅이 이런 신들을 부리고 있다는 데에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상제신이 부리는 3 신들을 환인(단군설화에서 최고 신)이 아닌 인간 환웅천왕이 부린다는 것은 무언가 혼동(混同)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와 비슷한 논조는 이강식에게서도 나타난다(이강식, 「3神 5帝 思想에서 형성한 고조선과 고구려의 3韓 5加 組織의 구조와 기능」,2005년,12,『단군학 연구』 제 13호,248.250.252 참조: 이강식은 천신교 교리체계에서 “환인천제에게서 땅에 내려와 등극함으로써 환웅천왕은 천제(天帝)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환인과 환웅의 본질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단군설화에서는 풍신(風神) 대신 風伯이며, 우신(雨神) 대신 雨師이고, 운신(雲神) 대신 雲師가 등장한다. 즉 신(神)이 아니라 백(伯) 또는 사(師)라는 사실이다.이에 대해서 이강식(상게서,250.252)은 신시에 3伯 5事 조직을 언급하고 있다. 백(伯)과 사(師)의 칭호를 백(伯)으로 통합시키고 있다. 3과 5라는 구조는 생각해 볼 수 있으나, 3 백의 기능이 무엇인지는 말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천신교 종교 테두리 안에서 제사집행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필자는 제사보다는 정치-군사적인 기능에 역점을 두고 설명하겠다. 그럼 이런 칭호 앞에 수식어 또는 복합어(風, 雨, 雲)는 무엇을 의미하려는 것일까? 이런 신적인 명사(名詞)들은 백(伯)은 하상대에 왕의 근친 귀족이기도 하다)과 사(師)라는 관직의 권위와 신성한 임무를 나타내려는 것이 아닐까? 그래야 그들은 환웅천왕의 신하가 되고, 환웅천왕은 상제신 같은 최고의 통치자로서 그의 신하들을 기능신들처럼 부릴 수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런 3 기능신들은 3 신하들로서 인간 통치자를 모시는 왕의 의지를 전하고(風 伯), 그의 적수들을 공격하여 패배케 하는 군사령관 기능(雨師, 雲師)을 수행하여 화(禍)를 보내는 동시에 자기들을 위해 구원과 승리를 보내는 사자(使者)가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환웅천왕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렸다는 문장이 국가 방어와 전쟁에 대비하는 군사 3000명과 3인 군사령관의 등장을 표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와 비슷한 정황은 이미 상대(商代)를 반영하는 역사와 가깝다. 따라서 단군설화는 신화와 신(神)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상대(夏商代)와 동시대적인 단군왕국과 백성 그리고 군사령관의 임무를 신적인 위력과 권위로써 서술하는 역사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런 인물들을 신화적으로 신성시하는 고대인의 서술방법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환인 상제신(桓因 上帝神)과 환웅(桓雄)의 재해석(再解釋)

 

이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겠으나, 고기(古記)에서 말하는 환인과 서자(庶子) 환웅,환웅이 거느리는 풍백,우사,운사의 신적인 존재들은 신 자체(神者體)가 아니다. 그들은 신(神)과의 관계에서 불러지는 신적인 칭호(稱號)들이며, 거룩한 인격(人格)이며, 신에게 맡겨진 인간존재이다. 따라서 어느 때는 ㅁ하느님(지존자)의 아들들ㅁ로서, 어느 때는 ㅁ사람이나,고관(高官)들ㅁ로서 불러지는 존재이다(시편 82:6-7 참조). 그들은 신들의 회의(會議)에서 하느님과 대화하고,의논하는 자리에 있지만, 심판도 받고,죽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현재 단군신화의 환웅과 단군의 존재는 신존재로 신격화 내지 신인화(神人化)된 존재로 혼동되고 있다. 고대 천상회의에서 유일신 하느님은 3인의 측근을 두고, 예언자나 사사들(士師,군장(軍將)들로 불리운다)을 불러 아들이라 부르며,지상(地上)의 일을 맡겼다. 이런 맥락에서 환웅과 단군 그리고 풍백,우사와 운사가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이에 대해서 방석종저, 『신화와 역사』,「단군신화의 천상어전 회의와 소명설화」,2006년,7-13쪽 : 삿 6; 왕상 22:19-21;사 1:18-20; 렘 23:18;시 82:1-2.6-7 등 참조). 환인 상제신은 지상과 떨어져 있는 보이지 않는 천상에 격절(隔絶)되 있는 것 같지만, 그는 환웅과 의논하고, 세상을 내려다 보고, 인간을 이롭게 하며, 아들에게 천부인(天符印) 3 개를 주어 소명(召命)을 맡기는 분이다. 이런 환인(桓因)의 신적인 행위는 환웅의 위력에서 계속 현현된다. 환웅이 3000명과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게 했다. 고로 환웅의 세상통치는 환인의 명령이지, 환웅 자신의 권위와 독자적인 힘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단군설화에서 환인이 환웅에게 맡기는 신적인 행위를 부지부식 간에 환웅의 것으로 전담(全擔)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런 국민적인 의식이 바로 최고 통치자로 하여금 성역(聖域)의 일인자(一人者)가 되게 하는 죄(罪)된 역사를 낳게 한다. 신(神)의 일을 인간(人間)의 일로 바꾸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적(神的)인 일을 차단시키는 것이다. 결코 환인 상제신은 ㅁ격절신(隔絶神)ㅁ이 아니다. 그는 환웅의 통치에서 계속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는 환웅과 “의논하고, 세상을 관심하고,인간사를 구원하며,인간을 아들로 불러, 그의 힘을 맡기는”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는 신(神)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단군신화에서 환인 상제신의 품성(稟性)과 행위(行爲)를 몰라보고,인간 환웅만 쳐다보고 있었다.단군설화(신화) 연구가들은 환인의 본질문제에만 급급했지, 설화 본문(本文)에 서술된 환인의 품성에 대한 구체적(具體的)인 문자적(文字的)인 해석에는 등한(等閑)했다 : 환인의 아버지됨, 세상을 내려다 봄, 인간의 구원, 신적인 의무를 허락함에 대해서 보다 풍부한 이해를 촉진해야 할 것이다.

 

2. 석유환인(昔有桓因),삼위태백(三危太伯),홍익인간(弘益人間)의 어의와 문구분석 문제

 

대홍수 재난(大洪水 災難)과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관계성에 대한 재해석(再解釋)

 

단군설화 본문 : 고기운(古記云)

 

"대 홍수 재난이 있던 때 환인의 서자 환웅이 수차례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탐하여 구하니(昔有桓因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父知子意), 삼위태백아래를 내려다보니(下視三危太伯)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함이라(可以弘益人間),이에 아들에게 천부인 3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乃授天符印三個 遺往理之)환웅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雄率徒三千),태백산 마루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降於太伯山頂,神壇樹下)이곳을 신시라 이르고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불렀다(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위의 본문은 고기(古記) 첫머리에 나오는 ㅁ천상계(天上界)ㅁ의 정황이다. 석유(昔有)는 일반적으로 ㅁ옛날로ㅁ불러지는데 그와 연결된 환인이 신이라면, 석(昔)은 단순한 ㅁ지난날ㅁ로 해석될 수 없다. 어떤 사건(事件)이 있던 과거의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에 대한 연결된 상황은 하시삼위태백(下視三危太伯)에서 삼위태백(三危太伯)의 높은 지대는 홍수의 대재난의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지대로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弘益人間)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昔有桓因, 三危太伯, 弘益人間 이 세 개의 어휘들과 문구(文句)는 동일한 정황과 그에 대한 대처행위를 암시한다. 인간의 생활을 위협하는 재난과 위기 그리고 그를 극복 해결하는 구제행위에 간섭하는 신적神的)인 영역을 추상(推想)할 수 있다. 특히 [옛날]로 읽어 왔던 석유는 문자적으로 갑골문자(甲骨文字)의 기원을 갖는다면, 昔은 商代의 사람들이 홍수의 재난의 개념을 가졌던 지난날이 된다. 이런 대홍수의 재난의 기억은 각 민족의 공통적인 것이요, 그들의 창세신화의 요소를 이룬다.

이와 문학적으로 평행(平行)되는 것은 중국 문헌에도 나온다. 상서의 반경편, 굴만리(屈萬里,상서(尙書), 107-108; 당란(唐蘭),1973; 7-8에 보면 “천도하기 전후에 상왕 반경은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은나라에 크나큰 재난이 내리니(홍수), 선왕께서는 마음속으로 불안하게 여기셨다. 이에 일어나 백성의 이익(利益)을 살펴 천도하기에 이르렀다(殷降大虐, 先王不懷, 厥修作, 視民利用遷).“ 그리고 계속해서 "옛날 나의 선왕께서 아주 많은 공적을 쌓으셨으니 그분들은 모두 지대가 높은 곳으로 옮기셨다(古我先王 , 將多于前功, 適于山)"는 기록이 있다.

전체적인 문학적인 구성이 내용적으로는 차원(次元)이 다르지만, 민족의 대재난 홍수사건을 당한 지도자들이 백성의 세계의 관심을 두고 실제로 간섭하면서 그들을 높은 지대로 인도하여 도와서 구하였다는 내용은 공통적이다. 단군설화(檀君說話), 또는 단군사화(壇君史話)는 신적(神的)인 영역에서 환인 상제신(桓因 上帝神)과 그의 아들 환웅천왕의 대화와 동의의 과정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었다면, 중국상서 굴만리의 기록에는 자연재난을 당한 선왕이 백성을 도와서 이익을 살펴 안전한 높은 지대로 옮겼다는 정치적인 공적을 진술하고 있다. 전자는 신학적-종교적 제정일치(祭政一致)의 면이 지배적이라면, 후자는 세속적-정치적인 측면이 두드러지고 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단군설화는 고유명사와 고유지명을 상술한 데 비해서, 상서(尙書)는 은(殷) 나라 외에 고유지명의 구체적인 표현이 없다.

이상을 정리하자면, 단군설화에서는 환웅시대의 홍수 재난을 말한다면, 중국 상서 굴만리는 은대(殷代)의 홍수재난을 말하고 있다. 시대적으로 환웅천왕은 늦어도 용산문화 이전(기원전 2300년-1800년) 시기인데, 은나라는 용산문화(龍山文化)의 기원(紀元)을 가진 후대의 시대(기원전 1800년-1100년)에 속한다. 그리고 문자적-문학적으로 갑골문자(甲骨文字)의 기원을 보이는 ”석유(昔有)“가 홍수재난을 의미하는 상대(商代)의 표시라면, 그것은 그 시대와 가까웠던 요임금(堯) 때(기원전 2300년경)의 홍수재난을 기억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단군설화에서 대홍수의 재난은 단군왕검(檀君王儉,기원전 2333년) 이전 환웅천왕의 시기로 올라간다. 즉 요임금 이전 더 오래 되었던 대홍수시기를 기억하는 과거의 대홍수 재난이 단군설화 고기(古記) 벽두에 나오는 ㅁ석유ㅁ(昔有)로 표현된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문학사적으로 그것이 고대의 구전적(口傳的)이든 전승된 기억(記億)이든 단군설화의 대홍수 재난을 시초로 환웅천왕이 인간을 대홍수의 위험에서 구원할 높은 지대의 산들을 내려다보고 인간세상을 사랑하며 관심을 보여 도와주고 인간(人間)을 구원한 지도자라면, 은 나라의 선왕은 민(民 )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나타난다.

시대적으로 홍익인간 시대 이후 에 오는 ㅁ민리(民利)시대ㅁ라 할 수 있다. 좌우간 시대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고조선 족이 중국의 족속 보다는 국가를 먼저 세우고 문명을 일으켜 후대의 중국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만은 사실로 드러났다. 갑골문자원형 ”석(昔 ,홍수의 재난)“과 함께 역사가 시작 된 나라는 인간 위에 환인 최고의 절대신의 존재를 주인으로 모시고 출발했음을 명시(明示)하고 있다.

부록(附錄) : 단(壇)과 요(堯)는 고대 중동 바빌론의 유프라테스 강 유역 ㅁ지쿠랏트ㅁ(Zikkurat,인공으로 쌓아 올린 흙 언덕 산 위의 신의 제단 성(城) ) 신전(神殿)의 제단과 공통점이 있는 흙을 쌓아 올렸던 형태와 일치된다. 홍수의 재난(災難)을 대비하여 신을 향하여 만든 제단이다. 다만 요(堯)는 제단 보다는 민을 위한 농토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흙으로 쌓은 뚝(제방)만을 의미하는 것 같다.

삼위태백(三危太伯)에 관하여 : 『서경』과 『회남자』에 의하면, 삼위는 중국 서쪽 변방 돈황 남쪽 산 이름이다. 『산해경『에는 삼위산은 조서산 서쪽을 가리킨다. 그리고 『상서(尙書)』는 융인(戎人)이 말하는 3 봉우리 산을 언급하고 있다. 제왕운기의 註와 승람 권 42는 구월산, 아사달에 삼위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삼위는 고유지명(固有地名)으로서 돈황 남쪽이고, 융인이 아는 3 봉우리 산이라면, 이 산은 현 ㅁ감숙(甘肅)ㅁ지역이다. 즉 내몽고 자치 지구와 신강 자치구 중간 지역 어딘가 있다. 그리고 태백은 아사달 또는 묘향산이라면, 한반도 지역이다. 만주지역을 벗어난 40도/95도 선상과 천산산맥 아래에 있는 중국 서북쪽의 지역에서 한반도 지역에 미치는 광활한 지역을 살펴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삼위는 중국지역에 있는 산의 고유지명이고, 태백은 한반도에 있는 산의 고유지명이다. 멀리 떨어진 두 개의 다른 지역이 결합된 것은 영토사적인 관점에서 오랜 역사 기간을 지나면서 고대전승과 후대전승이 문헌적인 근거를 가지고 어느 시점에서 고정(固定)된 편찬 작업을 보여주는 것 같다. 확실한 것은 후대 태백이라는 지명이 한반도(韓半島) 묘향산에 일치 한다면, 중국과 만주에서 한반도로 이동했던 역사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위에 인용된 『위서(魏書)』에 기재된 아사달과 동일한 한반도내의 지역에 일치한다. 따라서 『위서』의 편찬연대에 가까운 시대에서 『고기(古記)』의 편찬을 생각해 볼 수 있다.

 

3. 대홍수 재난과 홍익인간에 관한 문학적인 평행(文學的 平行) :

 

1)단군설화에 나타난 문장양식

 

고조선 시초: 昔有桓因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遺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 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대 재난이 있던 때 환인의 서자 환웅이 수차례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려고 탐하니,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 아래를 내려다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함이라,이에 아들에게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으니, 환웅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이곳을 신시라 부르고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불렀다."

 

2)중국 상서(尙書) 반경편(盤庚篇)에 나타난 문장양식

 

중국 은(殷나)라 시초 : 殷降大虐(昔有桓因), 先王不懷(庶子... 數意天下), 厥修作(貪求人世)

,視民利用遷(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古我先王,將多于前功(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 神壇樹下), 適于山(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천도하기 전후에 상왕 반경은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은나라에 크나큰 재난(홍수)이 내리니, 선왕께서는 마음속으로 불안하게 여기셨다. 이에 일어나 백성의 이익을 살펴 천도하기에 이르렀다,(그리고 계속해서) ”옛날 나의 선왕께서 아주 많은 공적을 쌓으셨으니, 그분들은 모두 지대가 높은 곳으로 옮기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4.양식사적 비평(樣式史的 批評)과 삶의 자리 (Sitz im Leben)

 

위에 두 본문은 대홍수 재난을 당했던 인간 백성세계를 위해 환웅천왕(고조선)과 은나라 선왕(先王)이 마음에 염려를 나타내고, 세상에 들어와 인간/백성을 위해 구원하는 일에 힘쓰는 업적을 세우고, 특히 낮은 벌판에서가 아니라 높은 산에 자리를 잡아 거주지를 확보하는 역사를 이루고 있다. 단군설화는 종교적으로 거룩한 신시의 축성(築城을) 기술하고 있는 반면, 중국 문헌은 정치사회적인 세속적인 도시(都市)를 건립한다.

지금까지 단군설화의 초기역사적인 상황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채, 환웅의 태백산 아래로 하강했다는 신화적인 서술로 종교제단에만 관심을 집중해 왔다. 그리고 환인의 존재는 주목하지 않았던 편이다. 왜냐하면 단군설화 연구자들은 석유환인인가? 석유환국인가? 라는 논쟁에만 관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필자는 본문 맨 앞에 “석유(昔 有)”는 앞에서 상세하게 설명한대로 상(商)나라 이후 대홍수 재난의 개념을 가진 갑골문에서 연유했던 의미를 가지고 단군설화의 시초역사(始初歷史)를 보고, 그와 연결 될 수 있는 홍수재난을 피할 수 있던 안전지대로서 삼위태백(三危太伯)이라는 높은 지대, 그리고 인간과 백성들이면 누구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弘益人間이라는 통치이념을 어의학적인 평면에서 시도(試圖)해 보았다. 이런 사자성어(四字成語)의 나열과 어의학적인 연결은 고조선 건국의 시초가 대홍수 재난에서 요청될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따라서 고대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창세신화와 홍수 사건이 ㅁ요하, 대릉하와 난하ㅁ 유역에 있던 고조선인들에게 체험된 역사요, 그런 위기 속에서 환인이라는 신(神)의 문제, 환웅( 桓雄)의 군장적인 지배체재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보게 한다. 중국 중원과 황하의 대홍수 재난의 역사가 하은주(夏殷周)에서 기억보존 전승되었던 것처럼, 동북지역 여러 강의 대홍수의 기억도 고조선 단군설화 벽두에 ㅁ석유환인(昔有桓因)ㅁ이라는 문구로 -갑골문자 ㅁ석(昔)ㅁ 대홍수 재난의 과거-작성될 수있었다면, 우리는 이제부터 옛날 이야기 속에 현실적인 위기의식과 목적 없이 그냥 환인과 환웅 있었다를 대홍수 재난을 염려하고 하늘에서 높은 산들을 보고 그곳으로 가서 인간/백성을 살렸던 환인과 환웅의 역사를 찬양해야 할 것이다.

 

5. 결과

 

일반적으로 고대 고조선은 일본과 중국의 정치적인 의도 때문에 역사적으로 잘 알려지지 못했던 우리 역사의 부분이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되어 망각되었더라도, 땅속에 묻혀 있던 유적과 유물은 언제건 밝혀지게 되어 있다. 근자에 만주지역(중국 북경 근처 포함)에 홍산문화와 우하량 문화 그리고 하가점 하층문화가 발굴됨으로써 고조선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ㅁ우하량의 여신제단ㅁ은 곰과 호랑이 토템 종교의 배경을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단군왕검은 중국 요 임금과 동시대의 전설적인 시대에 있었으면서, 하가점 하층 문화와 환웅시대와 함께 모계와 부계사회의 변천과정을 환웅과 웅녀의 결혼 이야기의 배경을 말하고 있다. 석유환인-삼위태백-홍익인간의 병렬은 두 가지 측면을 새롭게 보도록 기여하고 있다:

하나는 갑골상형문자로 석(昔)은 선사시대의 대홍수 재난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필자는 이런 어의(語意)를 단군설화 석유(昔有)에 끌어 드려 ㅁ옛날에ㅁ를 ㅁ대홍수 재난이 있던 때ㅁ로 재해석 했고, 상대(商代)에는 서자(庶子)를 적자와 구별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자를 관직으로 해석하려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문맥상 맞지 않는다. 고조선은 하은(夏殷) 나라와 가까이 있으면서 인습적으로 가족의 의미로 서자를 사용했으리라 생각 된다.

다른 하나는 대홍수 재난과 홍익인간과 평행 되는 중국 『상서(尙書)』 「반경편」에 기록된 은나라의 홍수 기록에 관한 문학적인 평행문(Parallel)의 양식사적인 비교분석이다. 내용은 앞에 II. 문제제기와 방법론 아래 3.을 보라. 이런 언어적-문학적인 작업을 고고학적인 유적/유물과 연결해서 탐구하여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망각된 역사적 실체와 문명 속에 불변요소들이 생명으로 소생하여 일어 날 것이다.

 

 

III. 단군설화 본문의 문화사적인 고찰

 

1. 곰과 호랑이 토템(Totem)과 앙소문화(仰韶化文) 시대

 

단군사화 주석 본문 : 『고기』 이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時有一熊一虎同穴而居) 늘 신령스런 환웅에게 변하여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常祈于神雄願化爲人).

 

이 본문은 ‘무리사회(마을사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원시 사회의 초기 단계를 반영한다고 본다. 고대 중국 문헌들 『여씨춘추-시군람』, 『예기-예운』, 『한비자-오두』와 고서기록에 의하면, 원시 무리사회를 여러 면에서 진술하고 있다. 특히 모계, 여권 주도 사회와 토템종교 현상을 나타낸다. 『여씨춘추-시군람』에 보면, 태고에는 군(왕)이 없었다. 어머니(母)는 알고 있으나, 아버지는 모르고 일부일처 가정이 아직 출현하지 못하여 세계(世系)는 묘계가 주축이었다.

『예기-예운』에는 "옛 선왕은 궁실이 없어 겨울에는 영굴에서 거주하고 여름에는 증소에서 거주하였다." 『한비자-오두』에는 "상고에는 사람은 적고 금수가 많아 사람은 금수를 이길 수 없었다" 고 했다. 고서기록에 의하면, "고대 황하 유역에는 삼황오제의 황제부락과 강서 염제 부락이 있었으며, 황하 하류에는 태호씨와 소호씨가 있었다. 태호씨는 몸은 뱀이고 머리는 사람인데(蛇身人獸), 용으로 관명을 하였고, 소호씨는 새(鳥)로서 관명을 하였다. 태호씨는 뱀토템 부락에 속하며, 소호씨는 새토템 부락에 속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는 기원전 6000년-5000년 전 삼황오제 시기를 전후한 원시사회 시대이다. 이는 앙소문화(5000-2500년)에 속한다.

앙소문화는 신석기 시대를 대표한다. 앙소문화는 1921년 스웨덴인 엔더슨이 하남성 승지현 앙소촌에서 채도와 석골기를 발굴한 데서 유래한다. 토기색채는 홍, 흑, 백색이다. 그 외에 요녕에서도 채도문화가 발굴되었다. 앙소인들은 이미 농경정착 생활을 향유하였다. 앙소인 골격은 몽고인종에 속한다. 그리고 남중국인계와도 아주 유사하다(앙소인은 현 중국계 조상이었다고 본다).

본인의 견해로는 신석기 시대에 몽골인 조상에서 몽골계와 중국계 앙소인이 갈라진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곰과 범 상이한 짐승은 이런 두 계통의 인종을 토템신앙으로 상징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 때 사회제도는 부녀들의 사회적인 지위가 높았으며 모권적인 씨족사회가 형성되었다.

*관련 고고학 유적지와 발굴물들: 원시시대(기원전 6000-5000년 전)와 앙소문화(5000-2500년)는 심양시 황고구 황하북대가 용산로 원시우배장경에 유적지로 보존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원시 반지혈식 거주형태와 땅굴 구멍이 두어 군데 메어진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우리 나라 제주도 삼성혈(三姓穴)과 비슷하다. 이는 토템 곰과 범이 같은 굴에서 살았다는 내용과 일치한다고 본다(기원전 10000년 전).

 

우하량, 동산취, 호두강의 홍산문화(紅山文化 ,기원전 4000-2000년)는 중국의 앙소문화(기원 전 5000-2500년)와 동시대이다. 우하량의 여신 제단은 기원 전 3500년 전 유적지이다. 제단의 원형은 남자 걸음 4걸음의 정방형 크기이다. 여러 석곽 묘지와 성인 걸음 2걸음의 무덤, 석곽들, 석널판 묘지 그리고 옥기 20개 정도가 발굴되었다고 한다(사진 참고). 우하량 이곳은 ㅁ女神故鄕ㅁ이라는 기념비가 도시로 진입하는 다리 입구에 세워져 있다. 요하의 문명 지대에 오래 전에 [웅녀=지모신]신앙이 토템형태로 있었던 것을 추측해 본다.

삼좌점 유적지에서 촬영 제재를 당했다. 안내자들은 우리들 일행에게 주의를 줄 정도였고, 홍산 유적지에 대한 공개를 꺼리는 것 같았다. 사진으로 어느 정도 볼 수 있겠지만, 요하문명 지대의 유적지는 대체로 공통적인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높은 산성과 고지대(고원 지대)의 취락 지구이며, 강물과 냇물이 넓게 흐르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에도 산기슭을 스치는 바람이 상쾌하다. 언덕은 이미 조밭이나 옥수수 밭으로 가꾸어지고 있다. 햇빛이 풍부하고, 넓은 들판을 거칠 것이 없이 조망할 수 있었다. 앞에는 강물, 뒤에는 산 그리고 수십리 또는 수백리 밖의 산들이 원시 마을들을 둘러치고 있다. 제단은 언덕 평평한 곳이고 마을과 전답의 중심부에 있다. 강변 높은 고지대는 외부의 공격을 의식하고 자리를 잡은 것 같다(별첨 사진2 참고).

 

2. 환웅과 웅녀(熊女)의 결혼과 용산문화(龍山文化) 시대

 

단군사화 주석 본문 : 『고기』 여자가 된 곰은 더불어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熊女者無與爲婚), 매번 단수 아래에서(故每於壇樹下), 아이를 잉태하게 해달라고 빌었다(呪願有孕),

 

이 때는 마을사회와 고을나라의 시기였다. 기원전 2800년-2000년 기간이다. 중국 하남,섬서, 산동, 하북성 또는 그 인근 지역 호북, 강소, 요령과 감숙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용산문화는 앙소문화(5000년-2500년) 보다 농업생산 규모가 확대 되었고, 마제석기를 사용했다. 용산문화 말기에는 모권제가 점차로 부권제(父權制)로 이양되었다. 용산문화는 기원전 2300-1800년에도 계속되었다. 동으로 발전하여 산동성 지역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농경문화의 목제보습도 나타난다. 삼황시대 신농의 목재 농기구가 발명 된 기록도 있다. 채도는 흑색, 회색, 홍색, 백색이 나온다. 일부일처제가 시작 되었다. 환웅과 웅녀의 결혼이 본보기가 된다. 남성 조상 숭배 습속이 생겼다. 사유재산의 형성과 빈부의 차이, 사회경제적인 편중과 불평등의 현상이 나타났다. 부권적인 사회가 정착 되었고, 정치군사적인 특권층이 형성되었다. 그와 일치해서 삼황오제 중 황제(黃帝) 는 무력(武力)으로 중국을 최초로 통일 하였다.

그와 대조적으로 환웅은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천왕(天王 )으로 제사장 형태의 통치자로 등극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 통치를 시작했다. 군사적인 무력 대 제사장적인 사원통치의 긴장이 생겼던 시대이다. 기원 전 3000년 경 석기시대 중동의 수메르의 우룩 4세와 드옘데트 나스르 시대(도시국가의 제사장적인 왕, 최고 제사장, 전쟁 군주의 기능을 갖춘 통치자, 기원전 2800년-2700년)와 흡사한 환웅천왕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 삼황오제가 무력적이라면, 고조선(단군조선의 전신)은 종교적 덕치주의라 볼 수 있다.

 

* 용산문화 유적지 :

하가점 하층문화(기원전 2500년-1500년)와 비파형 동검의 출토. 이에 관해서는 한창균의 고조선의 성립배경과 발전단계 시론,13-33쪽 참조; 윤내현 교수는 그의 『고조선 연구』, 127 쪽에서 한창균의 연구는 크게 주목받을 만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IV. 고조선의 영토사적인 고찰

 

1. 고조선 영토전승(領土傳承) 의 문제

 

만주 지역에 고조선 유적이 있다는 논문들과 조언(복기대 박사, 하문식 박사 등)에 힘을 얻어 요동반도 일대와 요하 일대를 탐방한 결과 신석기 시대 이후 중국 북경 근처 난하와 동북 만주 지역에는 중국 중원 황하문명과는 다른 요하문명(遼河文明), 즉 고조선 문명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증거가 되는 고고학적 출토물들 : 비파형동검, 세형동검, 돌무지무덤, 돌곽무덤, 고인돌무덤(지배층무덤), 미송리형토기 등이 고조선 문명의 특징을 나타낸다.

 

중국 북경 근처에서 동북평원(東北 平原)이 동북 쪽 요하를 따라 북상(北上) 하여 여러 강들 수강, 송화강, 목단강, 흑룡강, 오소리강 등 그의 유역을 지나 연해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해안을 따라 한반도 서부평야와 연결된다. 이런 지역에서 출토 된 비파형 동검은 예,맥, 고구려, 부여, 진번, 조선족에 의해서 제조된 것이다. 이런 지역의 나라들을 윤내현은 고조선을 중심한 거수국(渠帥國)이라 부른다. 현대적인 의미로 거수국을 연방국(聯邦國)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고 본다.

난하유역(북경근처)을 경계로 난하 서쪽의 중원과 난하 동쪽의 만주(남만주와 북만주)와 한반도 남부까지 분포된 지역의 다른 문화를 지적하고 있다. 정치사적으로 난하 서쪽 황하와 중원(中原)의 하(夏), 상(商), 서주(西周)의 강한 정치 세력과 고조선은 마주하고 있었다이런 일대는 조선족을 중심(中心)했던 만주족들이 연방국 형태로 중국과 달랐던 요하문명을 발전시켰다.

文明은 전통형성(傳統形成)의 바탕이 된다. 이것을 3가지로 나누어 그의 합법성과 정당함을 인정받으려면 역사와 문화 차원에서 가능하다. 필자는 이런 전통형성 이론(理論)을 학술적인 차원에서 다루며, 전문적인 근거와 확실성에 맞추어 구성하려고 한다.

이런 해석 방법을 단군사화 본문에 적용하여 필자는 단군왕조의 전통과 영토 전승을 일반인과 전문 학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법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여러 사화(史話)들을 주의 깊게 보면, 그 안에는 일반적인 표현 기술 속에 여러 관점들과 다양한 해석이 담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특히 단군 관련 사화들을 살펴보면 그 속에 오래고 다양한 역사성을 함축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이번 고조선 유적을 탐방하고 나니 단군조선이 중국과 동시대에 만주 땅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일으켰고, 정치적으로 중국과 교류 또는 투쟁하면서 중국 북경 근처에서 고조선을 건국했고, 만주 전체의 영토에 걸쳐 난하, 대릉하와 요하, 송화강, 목단강, 흑룡강, 오소리강 유역에서 요하문명을 형성했던 세계사적인 문화 민족이라 느꼈다면 동감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필자는 의심이 앞선다. 국수주의자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고 본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에서(구석기-신석기 시대) 정치적인 존재(청동기 이후 시대)로 발전했다. 민족사를 제대로 확립하려면 조상들의 행위와 업적을 객관적이되 주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전통을 분석하여 역사와 문명의 법적인 근거로서 합법성(合法性)을 유지해야 한다. 전통이 형성되려면 어떤 요소들이 있어야 하나? 위에서 말한 G. Fohrer의 이론을 빌려 3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1)고조선 역사 이전 문화를 중국의 문화와 비교하면서 구석기-신석기 시대로 돌아가 그 유적을 보고 우리 조상들의 선사시대(先史時代)에 관심을 가진다. 그들의 생활 유적이 나온 정착지역(영토)을 우리의 영토로 계산하는 의식이다.

2)고조선의 출발 연대와 멸망의 연대 동안 이웃에 있던 나라들(중국과 조선족 계열, 연맹의 공동체 집단)과 가졌던 정치적인 긴장관계 그리고 영토의 확장과 위축의 시대를 관심하고 우리의 고유한 정신과 문화를 추적하는 것이다.

3)고조선의 정치적․종교적인 지도자의 그룹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행위와 업적을 승계하는 과제를 가짐과 동시에 영화의 역사와 고난의 역사를 민족적인 성찰 요소로 보존하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 정리하면, 우리는 영속적으로 ‘영토와 민족’이란 두 개의 주제를 전통이란 정신적인 의식에 두고 현재화(現在化)할 과제를 가지고 있다.

 

2. 요하문명 對 황하문명의 역사적인 관계

 

고조선 유적에 대한 문헌 기록은 국내 자료와 중국 자료를 함께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우선 『심국유사』 속의 단군사화와 그 속에서 제시한 고문헌들을 토대로 해서 비교 분석해보고자 한다. 특히 삼국유사에서 인용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서들 위서, 당배구전과 통전에서 여러 지명들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예를 들면 아사달(위서), 고죽국(당배구전), 현도, 낙랑, 대방(당배구전), 진번, 임둔(통전) 등이다. 그런데 고기에는 삼위태백, 태백산, 평양성, 조선,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 아사달의 지명이 다양하게 나열되고 있는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런 지명들의 지리적인 위치는 어디인가? 어느 시대에 있던 지명(도시)인가? 이런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대답이 요청 된다. 이에 대해서는 우선 사화의 본문을 직접 대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 하겠다.

 

『위서』에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불렀는데 중국의 堯와 같은 때이다. 『고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중략) 왕검은 요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이 되는 경인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불렀다.

 

단군왕검이 중국의 요와 같은 시기에 아사달 평양성에 도읍하고 조선이라 불렀다고 한다면, 단군은 이미 국가형태의 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단군왕검 이전에 이미 ‘환웅천왕’이 지상에서 통치를 한 내용이 나온다. 단군왕검 이전의 나라와 사회형태는 어떠했던가? 이에 대해서도 우리는 단군사화 본문을 토대로 분석할 수 있다. 환웅이 세상을 통치하기 전부터 곰과 범이 같은 굴에서 살았다는 구절에서 ㅁ무리사회ㅁ, 곰과 범이 인간이 되기를 빌던 중, 곰만 인간 여인이 되어 살던 시대는 ㅁ마을사회ㅁ], 웅녀가 환웅과 결혼하여 살았던 시대는 ㅁ고을나라(부족사회)ㅁ의 사회상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윤내현의 "환인시대는 떠돌이 생활을 하던 무리사회 단계"라는 주장에는 이견을 갖고 있다. 필자는 위에 곰과 범이 한 동굴에서 살았던 시대를 무리사회로 규정한 바 있다. 본인의 견해로는 환인은 천상의 존재로 상제신 위치이기 때문에 그는 환웅(천왕)과는 구별된다고 본다. 나중에 상제신 사상은 중국의 夏와 周 나라에서도 신의 위치로 국가를 세워주는 최고의 신이다. 고로 윤내현은 단군신화에서 환인(=神)의 존재를 간과하는 것 같다.

선사시대와 원시사회에 나타난 무리사회, 마을사회, 고을나라와 국가의 4단계는 요하유역의 고조선 문명의 형성지요, 동시에 중국의 앙소문화, 용산문화와 시기를 같이 한다. 그럼 이런 원시사회의 마을과 국가는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 시기적으로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다고 본다.

단군사화 본문에서 『위서』는 ‘아사달’을 말하고, 『고기』는 ‘평양성’을 도읍지로 언급한다. 이런 두 도읍지는 동일한 지명인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두 도읍지는 동일한 곳으로 한반도 안의 지명으로 해석(삼국유사에서 일연과 이병도)

2)두 도읍이 다른 곳에 위치한다는 견해 - 윤내현은 만주 요동 지역 요령 본계시 ‘검독, (임금의 터)’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위서의 아사달은 단군조선 말기 또는 한사군 설치 이후 지금의 ‘평양’이라면, 고기의 평양성은 단군왕검 건국 초기의 요녕에 있던 ‘검독’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ㅁ백악산 아사달ㅁ은 ㅁ난하지역(북경근처)ㅁ ㅁ장당경ㅁ은 기원전 12세기 당시 기자 조선의 식민 영토로 인한 ㅁ대릉하ㅁ 천도(난하와 요하 사이 지역) 그리고 아사달은 한사군 설치 당시 지금의 평양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고조선의 영토 확장과 위축이라는 긴장관계에서 우리는 만주지역과 한반도를 폭넓게 보고 고조선의 지명들을 조심스럽게 고찰해야 할 것이다. 이런 지역에 자리잡고 살았던 만주족은 이주민이 아니라 그곳에 토착민으로 국가를 형성했던 조선족이었다.

이상과 같은 검토로 보아 최근 중국이 심양 요녕성 박물관을 확대 개관하면서 대대적으로 ‘요하문명전’을 소개한 데는 우리 고조선의 문명을 미리 선점하고자 하는 전략이 숨어있다고 본다.

 

3. 단군왕조(檀君王朝) 전통(傳統)의 문제

 

앞 단락에서 환웅천왕은 인간이 된 웅녀와 함께 결혼함으로써 나라의 기초를 ‘인간됨’과 ‘계약’ 관계에서 준비하였다. 이런 신적인 가정에서 출생한 단군왕검은 천손의 계보를 이어단군왕국을 건설한다. 그에 대한 단군사화 본문을 읽으면서 새로운 문제들을 찾아보고, 왕국전통과 영토전승이란 두 개의 큰 주제를 논의할 수 있겠다.

단군왕검과 단군이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천 오백년 동안 그곳에서 통치했고, 단군의 후계들이 통치하던 중 기원전 12세기경 주나라 호왕의 침공으로 장당경으로 천도했으며, 계속해서 어떤 정변으로 인해 단군의 후계 중 어느 한 단군이 아사달로 귀환하는 정치적인 변동이 있었다.

 

단군사화 주석 본문 : 『고기』 왕검은 요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이 되는 경인에(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 평양성에 도읍을 하고(都平壤城), 비로소 조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始稱朝鮮),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또는 금미달이라는 이곳에서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又今彌達御國一千五百年), 주나라 호왕이 즉위한 기묘에(周虎王卽位己卯),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封箕子於朝鮮),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壇君乃移於藏唐京),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나이가 1908세였다(壽一千九百八歲).

 

단군왕검은 중국 요 임금(기원전 2400년 경) 시대 단군(고조선) 왕국의 왕이 되었다. 이는 더 이상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 역사이다. 단군왕국은 중국의 용산문화 초기 또는 앙소문화 말기(기원전 5000-2500년), 고대 중동 앗카디안 제국(기원전 2350-2050년)과 동시대에 건국 하였다. 설령 중국의 요나라가 전설시대라 해도, 그를 계승했던 夏왕조(2050-1550년)는 용산문화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이미 하왕조 시대는 노예제 국가를 형성 하고 있었다. 이런 정치-사회 상황에서 [홍익인간] 통치이념은 민주적-인도적인 정신으로 평가 받을 수 있다. 단군왕검과 그의 후계 단군들은 환웅으로부터 桓因神, 上帝神에게서 홍익인간 정신을 받고 천손계를 형성하면서 영토를 넓혀 나갔다. 평양성,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아사달이라는 4개의 지명이 단군왕국의 영토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4개의 지명이 동일한 지역은 아니다. 서로 다른 시기와 시대에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런 지명의 위치는 어디였는가? 조선이란 국가가 한반도라면, 한반도 안의 지역이라 할 수 있지만, 조선이 만주 지역에 있다면, 그런 도읍지는 만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일연과 이병도는 지명들을 한반도 안에 국한 시켰지만, 현재 단군설화 연구자들은 한반도 지역설을 받아드리지 않는다. 이에 대한 논의는 한반도 밖의 만주 지역으로 옮겨져서 행해졌고, 결과가 나와 있기 때문에 필자는 최근의 결과를 근거로 내용을 전개하고자 한다.

『한단고기』와 『규원사화』에도 고조선의 왕 칭호로서 ‘단군’과 초대 단군의 명칭 왕검 (王儉)이 나온다. 이후 왕검의 후계자 단군들 부루(夫婁)에서 연나(延那) 2333년-1133년까지 ; 왕검 이후 연나는 기원전 1183경에 재위 11년을 다스렸다. 그러나 주나라 호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던 기원전 12세기에 (아마도 솔나(率那)-재위 88년, 1183-1095년 경) 연나와 솔나를 비롯한 단군들은 ‘장당경’으로 천도하였으며, 그 후 기원전 108년 경 고열가(古列加) 47대 단군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조선은 제1대 단군 ‘왕검’을 비롯해서 47대에 이르는 단군들이 나오고, 평양성(만주 요녕 부근 - 검독 儉凟) - 백악산 아사달(난하 북경근처 만리장성 접경지역) - 장당경(대릉하와 요하 사이) - 아사달(한반도 대동강 지금의 평양)로 도읍을 천도하는 정치적인 정변을 겪으면서 영토의 위축을 가져 왔다. 요하유역에서 요하문명을 일으켰던 왕검 조선이 만주의 서남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1500년간 다스렸지만, 기원전 12세기에 와서 난하와 요하 중간 지대 대릉하, 장당경으로 위축되어 요녕 서북쪽 가까이로 쫓겼던 역사이다.

한편 이른바 재야 사서(史書)에 대한 각성을 촉구한 사람은 현 단군학회 회장 이재원 교수이다. 이 교수는 지난 단군학 13호 논문에서 규원사화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면서 규원사화의 위서(僞書) 논란을 재고케 하는 역사적․문학적 가치를 서술하였다. 강대국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규원사화』 및 『한단고기』 저자들의 역사서술의 의식은 오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며 아울러 각종 단군사화를 다각적으로 검토하여 그 전통사상을 창조적으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4. 환인 상제신(桓因 上帝神)과 하은주(夏殷周)의 천사상(天思想)

 

고조선과 중국의 역사철학과 통치사상은 처음부터 출발이 달랐다. 삼황오제의 황제(黃帝)와 요(堯)는 무사(武士)로서 무력통일로 통치를 시작했다. 중국 역사책 상서(尙書)에 의하면, 周의 천사상은 우주삼라만상을 창조하고, 천지자연법칙을 운행하며, 인간사를 감시규제하는 절대신이다. 국가건국의 명령을 내린다. 주왕(周王)은 천명을 받고 천자(天子)가 된다. 그의 지배영역은 천하 전세계이다. 하늘아래 전 영역은 주왕의 영토(領土)이고, 거기 거주하는 모든 백성은 주왕의 신민(臣民)이다.

이런 천(天), 천명(天命), 천자(天子), 천하(天下)로 형성된 제왕사상과 중국위주의 세계관은 중국역대 군주(中國歷代君主)에게 전승된다. 기원전 1121년-770년까지 351년 동안 주나라는 이런 통치사상으로 주변을 위협했다. 이런 천명설은 하왕조(夏王朝,2050-1550년)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단군사화에 보면, 환웅, 상제신(上帝神) 천신(天神)은 지고신으로서 하늘에 군림하고, 땅위의 인간에게 혜택과 징벌을 내리는 자비와 심판을 주는 분이다. 인간은 제의와 기도로써 그에게 호소하고 도움을 청할 수 있다. 단군사화에 보면, 환인은 그의 아들과 대화하며, ㅁ홍익인간ㅁ이란 천명을 주고 통치권을 위임한다. 환웅은 천신의 아들(天子)로서 웅녀와 결혼한다. 천신과 인간의 약속이 성립된다.

따라서 중국의 천사상은 정치적-민족적이라면(국가단위), 단군사화의 천신은 우주적-보편적인 인도주의 사상을 나타낸다. 이런 사상은 구약 창세기 1:26-28의 하느님 형상의 인간이 하느님의 복을 받고 세상의 통치권을 위임 받는 것과 가깝다. 하느님(상제신)은 하늘에서 세상의 군왕들과 백성들을 동등하게 그의 신하로 여기며, 그들에게 통치권을 맡기는 분이다. 따라서 우리는 상제신의 신관을 가지고 중화주의 사상의 차이를 항구적으로 조정할 노력이 필요하다. 요순(堯舜) 시대가 다시 오기 전, 중국의 통치사상은 바뀌기 어렵다.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은 역사적으로 주(周)의 천명사상 노선과 다르지 않다. 그들이 정치적-무력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힘이 있어 보이지만, 우리는 단군사화의 홍익인간의 천명을 우주적-보편적으로 수행하는 민족으로서 우리조상들이 정착해 살았던 만주지역을 기억하고, 조선족에게 도움을 주는 행동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단군사화의 단군왕조와 그의 영토전승은 민족사의 출발(出發)이며, 우리 토대의 원광석(原鑛石)이기 때문이다.

 

 

V. 종합적 고찰(綜合的 考察)

 

요하문명(遼河文明)의 고조선 역사와 문화

 

우리는 앞에서 ㅁ요하문명 對 황하 문명의 역사적인 관계ㅁ에서 난하 대릉하와 요하 요령에 걸쳐 있는 선사 시대의 몽골인들의 유적지, ㅁ앙소 문화와 토템, 모권 지배 사회ㅁ, ㅁ용산 문화와 부권 사회ㅁ, ㅁ고을 나라와 국가 단계ㅁ, ㅁ단군 왕조 전통과 영토 전승ㅁ까지의 내용을 단군 조선(고조선)의 역사가 되는 일연의 단군사화(壇君史話)의 짧은 기록(대략 53절)을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서설과 문제제기 그리고 본론에서 보면, 이런 신화적 전설시대는 문명사적(文明史的)인 틀에서 고고학적인 유물, 특히 갑골상형문자(甲骨象形文字)-한문의 전단계의 역사-시대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단절되었기 때문에 망각 속으로 사라졌던 역사로 여겨져야만 했었다. 그럼에도 갑골문은 1899(1898)년 이후 출토됨으로 漢文時代 이전의 역사로 인정되었다. 이런 갑골상형문자는 선사시대와 가깝다. 하(夏)나라(기원전 2050 이후)에 갑골문이 이미 있었다면, 선사시대에도 부호문자(符號文字)는 의사전달의 매체 역할은 가능했을 것이다. 고고학적인 유물들과 함께 갑골상형문자와 가까웠던 고조선과 홍산문화(기원전 4000-2000년),그리고 고조선 성립기간의 하가점 하층(夏家店 下層, 2500-1500년) 문화, 우하량 문화(기원전 3500년경)는 중국의 앙소문화(기원전 5000-2500년)와 용산문화(기원전 2300-1800년경)와 기깝거나 동시대(同時代)이다.

지리적(地理的)으로 그리고 연대적(年代的)으로 고대 고조선은 만주(滿州)의 요하(遼河)를 중심으로 홍산문화와 우하량문화 그리고 하가점 하층 문화를 형성하면서 하은상(夏殷商) 나라의 조상이 되는 중국의 용산문화 보다 더 이른 요하문명(遼河文明)을 창조했다.

아직 고고학적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거나, 중국 측에 의해서 은닉되어 있다는 문제가 해결되면, 한문(漢文)과 중국문화(中國文化)에만 의존되어 왔던 고조선 문화는 고대 바빌론 보다 앞서 있던 수메르(기원전 3000년경, 2800-2700년, 수메르 복고시대 2050-1950년에 걸쳐 메소포타미아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최초의 고등문명을 세웠던 신국(神 國),사원 중심의 농경국가, 지도자는 왕, 제사장, 전쟁군주의 한 인격으로 갖춘 "위대한 인간"(Lugal)칭호를 가짐)와 상통한다고 볼수 있다.

역사적인 유물(歷史的 遺物)을 근거로 고찰하면, 고조선은 중국 황하문명과 다른 고조선 복식, 채색 질그릇, 비파형 동검, 세형동검, 석곽 돌무덤, 고인돌을 남겨 놓고 있다. 윤내현 교수에 의하면, 고조선은 요하 심양 근처 평양시 검독(儉瀆 : 현 본계시(本溪市)에 도읍을 정하고, 난하(북경 근처), 장당경 대릉하(난하와 요하 사이 지역), 그리고 아사달(지금의 평양)로 옮겼던 영토사를 설득력 있게 주장하였다. 이런 역사적인 증거는 단군설화 본문을 통해 서술되고 있다. 기원전 2333년을 전후해서 환웅천왕과 단군왕검의 시대가 중국 삼황오제와 요순우(堯舜禹) 시대와 동시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갑골문자(甲骨文字) 시대와 관련 된 석유(昔有 : 요임금 전후 황하 유역의 대홍수 재난을 말하는 옛이야기), 서자(庶子: 상대에는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없던 형제관계를 의미한다.),삼위태백(지리적으로 국가 영토 경계가 아니라, 인류의 거처, 중국에서 한반도를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 환웅천왕과 단군왕검에 나타난 왕(王)칭호는 갑골문자로 높은 지위를 갖춘 왕의 위엄을 표하는 삼각형 또는 깃털을 꽂은 모자(관 冠)를 상징하는 갑골문자들이다.. 위에서 고찰한 것을 정리하면, 고조선은 요하와 황하 강을 중심으로 중화민족의 조상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각자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교류하고, 충돌하는 역사를 경험하고 공통된 발전 단계에서 고등문명을 이룩했던 것 같다.

 

요 임금과 동시대라면, 고조선 건국 전후에 해마다 거듭되는 대홍수 재난은 엄청난 피해를 주었을 것이다. 이런 대홍수가 있던 때(昔有), 환웅은 낮은 벌판에 사는 주민들을 살리려는 마음을 갖고(貪求人世), 높은 지대를 찾아(三危太伯),그곳으로 인간을 구출했던(弘益人間) 치적을 세웠던 역사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요순우 임금들의 치산치수(治山治水)와 병행되는 현상이다.

좌우간 지금까지 홍익인간 통치사상을 거듭되는 대홍수재난 앞에서 신(神,上帝,桓因)에게 간구하는 서자환웅(庶子桓雄, 상제신의 여러 아들들)의 홍익인간 통치사상으로 재해석(再解釋)할 필요가 있음을 제안한다. 그리고 고조선은 역사초부터 중국과 다른 신중심의 역사를 가지고 곰과 호랑이의 토템 종교를 극복했고, 중국의 천자와 무력통일의 정치가 아니었다. 고조선은 정치의 최상의 목적은 “인간됨”에 있었다. 그래서 인간이 된 곰과 웅녀는 고조선 국가를 이루지만, 인간 보다 공격적인 인간은 중구의 정치성향을 신화로 암시하는 것 같다.

단군사화는 내용적으로 두 종류의 역사를 가진다. 하나는 선사시대(환웅과 웅녀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의 왕조와 통사적(通史的)인 역사를 가진다. 선사시대의 역사는 역사연대(고조선 연대)가 아니고, 고고학적 시대(古考學的 時代)의 연대(年代)를 사용한다. 중국역사는 이런 시대를 전설시대 속에 넣고 있다. 고조선 건국 이전 시대는 중국의 앙소문화와 용산문화로 불리운다. 즉 신석기 초기와 후기 그리고 청동기 시대까지 내려 볼 수 있다. 그에 대한 중국고대 문헌(여씨춘추-시군람 등 앞에 나옴) 전승이 있다.

그 다음 중국과의 통사적 역사는 단군왕검이 요임금과 동시대에 출발하는 데서 그 거점을 잡게 된다. 단군고기에 나오는 위서, 당배구전, 통전은 저술적 위치가 중국 왕들의 역사 본기(本紀)와는 급수가 낮게 편찬된 전승이다. 즉 중국 통치자 아래 제후들의 개인이나 집단으로 취급되는 편찬이다. 이런 문헌 전승으로써 국가 왕조역사(王朝歷史)의 합법성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군사화 내용에 보면, 주왕조(周王朝)가 난하지역(현 북경근처)에 기자조선을 식민영토로 침공했던 역사, 그 다음 서한(西漢)이 대릉하와 요하(大凌河와 遼河) 사이를 침공해서 한삼군(漢三郡)을 설치했던 역사는 제후국 보다는 이민족의 적국(異民族의 敵國) 관계를 서술한다. 단군조선의 비극적인 영토축소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이어서 왕검(王儉)은 단군조선의 초대 왕의 고유명칭이다. 그는 평양성(만주 요령 부근 검독(儉瀆, 임금의 터)에 도읍을 정하고, 백악산 아사달(北京近處)로 옮기고, 그의 후계자들(壇君)들은-부루, 가륵 이후 연나까지- 장당경으로 쫓긴다. 마지막 47대 단군 고열가(古列加)는 아사달(지금의 평양)로 은신한다. 단군조선은 1500년간 남만주 요령에서 북경접경 지역을 통치하다가 기원전 12세기 이후는 대릉하 지역을 경계로 축소되었고, 마지막에는 요하지역(요령)을 경계로 축소되어 도읍을 아사달(현 평양)로 정하고 고구려가 요동 요하를 국경(國境)으로 건국 할 때까지 통치를 유지했던 것 같다.

단군조선은 중국 요나라부터 서한까지의 역사적인 통치 기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그러나 단군사화 기록에 여러 지명(地名)들의 혼란으로 한반도설과 만주지역설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이유는 중국이라는 강대국과의 정치적인 예속문제가 있었다는 점이다. 만주지역의 지명을 한반도의 지명으로 둔갑시켰던 왜곡의 역사이다. 그 다음은 일본의 개입이었다. 단군의 역사를 전설 등으로 변질시켜 역사의식을 포기하고 종교적인 의식으로만 집중케 했던 정책이었다. 따라서 중국사대 문화는 단군역사를 한반도 중심으로 환치시켰고, 일본교육은 역사적 사실을 무속적 종교세계로 변질시켰다.

동양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중국문헌 속에서 고조선 단군조선의 역사적인 존재를 찾아내면서부터, 단군조선의 한반도설은 만주지역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런 만주설은 아직도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하고, 학문적인 영역에서의 가능성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정도이다. 문제는 학자나 일부 정치인들 보다는 53절에 불과한 짧은 단군사화의 문학적 전승이 제왕운기, 규원사화, 응제시주와 세종지리지와 함께 국민적인 관심을 끌게 하는 것이다.

단군왕검과 단군 왕조는 고구려, 발해, 백제, 신라, 고려와 조선의 건국의 정당함과 합법성을 인정케 했던 한민족의 국가전통傳統)으로 전승(傳承)되어 왔다. 홍익인간(弘益人間) 통치이념은 환웅의 대명사로서 전설시대의 중국의 무력적 정복전통(征服傳統)과는 대조적이며 인도적, 민주적 사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왕검은 제1대 단군의 고유명사이며, 지명들과 함께 등장하는 단군들은 47대에 걸친 단군왕조의 제왕들을 대표한다. 이런 압축된 내용들은 중국의 역사서와 고고학적인 유물들로 보완되며, 때로는 수정을 거쳐 정리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다. 마지막으로 단군조선의 국가전통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위한 논리로서 윤내현 교수는 단군 은 중국의 천자 (天子)와 동격(同格)을 말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문헌과 연구성과 그리고 현지유적 탐방 등을 통해 두 개의 우리 고조선사, 즉 榮華의 역사(기원전 2333년-1200년 주의 기자 책봉 전 까지)와 고난(苦難)의 역사(周의 기자 조선 이후) 등을 파악했다. 이제 우리는 요하 문명(遼河文明: 남만주 지역 일대와 요동반도 및 북만주지역)의 고조선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시급하다.

 

 

 

 

 

 

 

 

 

 

 

 

Abstract

 

Prof. Dr. Pang,suk-chong

(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in Seoul)

 

Title : Yoha-civilization and civilized observation on the Ancient Chosuns History,

Yoha-civilization in Dangun Epic(Tale)

 

For the thesisses use I the methods of the historical-critical research. The table of contents is following : I. Introduction, II. problems and the methodology : 1. semantic analysis : seok-yoo(there was a great flood or at that time of the flood), seo-ja(several sons of the god "sang-je", sam-wi( geographical mountain in the near of kam-sook 甘肅 ), cheon-wang(heavenly king), "pung-baek,woo-sa,woon-sa" three wings, ministerial-military charismatic general. 2. analysis of sentnences and technical terminology, 3. literal parallelism of the great flood-events in the past, 4.literary-form criticism and Sitz im Leben, 5. result

III. Cultural observation on the Dangun Epic(Tale), 1. totemism of Bear and Tiger and culture of Angso 仰 韶, 2. marriage of Woong-nyeo(feme) with Hwan-woong and culture of Yongsan 龍 山

IV. Territorial-historical observation on the ancient Cho-sun, 1. problem of traditional territory in the period of ancient Cho-sun, 2. historical relationships between ancient Cho-sun and China : "Yoha-civilization vs Hwangha-civilization", 3.problem of the tradition of dynasty Dangun. 4. Hwan-in as highest god, sang-je and Heavens thought of dynasty "Ha,Eun,Joo 夏殷周“

V. Synthetic observation

 

Investigate we in the introduction, bringing forward of the problems and main discourse,find we a mythical and legend period in the frame of cultural history. Such periods belong to the prehistorical generations, that's especially kap-gol hieroglyph 甲骨像形文字. These letters were former stage of the chinese classics and compositions, but they were been breaking and hidden historically in the rapture, amnesia. In the 1899 were they for the first time found at Eun-hur in china. Kap-gol hieroglyph was used perhaps certainly in dynasty Ha 夏 -since 2050-in the same time of the Ancient Cho-sun(B.C. 2333).

With archeological relics and remains of prehistoric ages(generations) know we Hong-San culture 紅 山 文 化 (B.C. 4000-2000) and Woo-ha-Rhyrang culture 牛 河 粱 ( B.C. 3500), Ha-ga-cheom under stage culture 夏家店下層文化(B.C. 2500-1500) in the southern Manchu (南滿州). These cultures were belonged historically to the Chronology of Ancient Cho-sun. Their historical proofs are following : 1. dress designs, 2. varigated colors, 3. unglazed earthen ware, 4. lute-form copper sword, 5. more delicate copper sword, 6. stone outer-coffin, stone coffin and 7. tomb covered with big flat board-stone etc.

These things are sustantially different from chineses. The ancient Cho-sun created early their cultures in the wide territorial lands of southern-northern Manchu.

This is so called "Civilization of Yo-Ha 遼 河 " If the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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