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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답글]요하문명과 고조선 역사의 문명사적 고찰(考察)

조회수 : 2667

 

:방석종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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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문명과 고조선 역사의 문명사적 고찰(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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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사화(史話) 본문의 역사비평적 해석-

 

:

 

:방석종(方錫淙)

 

:前 감리교 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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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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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문제제기와 방법론

 

:

 

:1. 어의론적 분석: 석유(昔有), 서자(庶子), 삼위(三危),

 

: 환웅천왕(桓雄天王),단군왕검(檀君王儉)의 王 칭호,

 

: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 환인의 품성과 행위

 

:2. 석유환인-삼위태백-홍익인간의 구문적 분석

 

:3. 대홍수 재난 문학의 평행(Parallel)

 

:4. 양식사적 비평과 삶의 자리

 

:5. 결과

 

:

 

:III. 단군설화 본문의 문화사적인 고찰

 

:

 

: 고조선의 홍산문화(紅山文化)와 중국의 앙소/용산문화

 

:1. 곰과 호랑이 토템과 앙소문화

 

:2. 웅녀의 결혼과 용산문화

 

:

 

:IV. 고조선의 영토사적인 고찰

 

:

 

:1. 고조선 영토전승의 문제

 

:2. 요하문명 대(對) 황하문명의 역사적인 관계

 

:3. 단군왕조 전통의 문제

 

:4. 환인 상제신과 하은주의 천사상(天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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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종합적 고찰(綜合的 考察)

 

:

 

:

 

:I. 서설

 

:

 

:필자는 단군설화(사화) 연구를 위해 일차적으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史)에 실려 있는 고조선(古朝鮮) 역사 본문을 가지고 그의 시대와 문명을 폭넓게 보고 단군사화 본문을 개별적으로 주석하려고 한다. 문화사적으로 단군사화는 그의 연대 기원전 2333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사시대(先史時代)또는 원시시대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단군사화는 이런 시대적인 배경과 연결되어 본문(本文)이 주석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단군사화는 그의 역사적인 자료와 증거물이 충분치 못한 가운데 몇몇 사서(史書)의 인용(위서, 고기, 당배구전, 통전 등)으로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역사서는 후대의 편찬 된 내용들이라, 단군사화 본문의 내용과는 거리가 멀리 있는 후대의 창작물이라는 의심도 받는다. 특히 역사적으로는 전설시대(傳說時代)라는 틀에서 기록을 보아야하기 때문에 환인 상제신 옆에, 환웅(桓雄)과 웅녀(熊女)라는 인물은 역사적으로 말하기는 불가하지만, 수렵과 농경사회, 씨족사회의 형성은 신석기(新石器) 시대와 청동기 시대로 이행되었던 인류문명의 발전단계와 원시국가(原始國家) 성립과정을 반영(反映) 하고 있다.

 

:일찍이 중국은 전설시대의 하왕조(기원전 2050-1550년 추정)나 상왕조(기원전 1800-1100년 추정)를 상서,시경, 죽서기년, 사기 등에 기록해 놓았다. 이런 전설시대는 중원과 황하를 중심했던 선사시대의 앙소문화(기원전 5000-3000년 또는 5000-2500년)와 용산문화(기원전 2800-2000년 또는 2300년-1800년 추정)를 근거로 했던 시대로 정리해 놓았다. 중국의 하은상(夏殷商)나라는 공통적으로 용산문화(龍山文化) 이후(以後)에 등장하였다.

 

:그렇다면 단군왕조는 중국의 용산문화 기간에 건국되었던 국가이었다. 그는 중국의 고대 전설국가 보다 근 300년 먼저 세워졌던 역사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고조선은 문명사적으로 홍산문화(紅山文化,기원전 4000년-2000년)라는 독립된 문화를 발전시켰다. 우하량 문화(기원전 3500년 추정)도 발견되었다. 고조선 성립은 하가점 하층문화(기원전 2500년-1500년) 기간이었다. 고조선 문화는 현재까지 주로 고고학적인 출토물들 예를 들면, 고조선 복식, 채색 질그릇(적,백,황,흑색),비파형 동검, 세형동검과 석곽묘, 고인돌 등의 높은 수준의 예술 조형물 연구에 집중되어 있을 뿐이요, 그의 시대적인 상황이나 정치적인 현상이 중국의 역사기록물만큼 준비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단군사화 본문에 나타난 정치사회상들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고조선의 홍산문화 틀 속에 우하량(牛河梁)의 여신(女神) 종교와 하가점 하층문화(또는 豊下文化) 기간의 고조선 건국을 받아드리면서도, 중국의 앙소문화와 용산문화에 나타난 원시사회 성립과 발전과정들을 전제로해서 단군사화의 본문을 주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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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문제제기와 방법론(問題提起와 方法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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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앙소와 용산 양 원시-선사문화와 독립적으로 비슷한 시대에 난하/대릉하와 요하 유역을 중심해서 발전 되었던 홍산문화 틀 속에 우하량 문화(기원전 3500년경)와 하가점 하층 문화 (기원전 2500-1500년)는 단군 고조선 국가를 형성케 했다(기원전 2333년경). 시대적으로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요(堯)임금과 동시대적이었다. 이것은 위서(魏書)의 내용이다.

 

:그런데 고기(古記)에는 그보다 더 오래된 환웅시대를 ㅁ석유 昔有 옛날ㅁ에라는 설화문 도입구로 시작하고 있다. 이런 문구는 계속해서 서자환웅 수의천하(數意千下) 탐구인세 하시삼위태백(貪求人世 下視三危太伯) 가이홍익인간(可以弘益人間)이라는 4자 또는 6자 성어(成語)로 서술되고 있다.

 

:문제는 옛날은 어느 때 어떤 시기였는가? 삼위태백은 위치가 어디였는가? 환웅이 인간을 위해서 홍익인간을 갈망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상황에서 환웅은 인간을 위해 지대가 높은 산들을 찾았는가? 환인(桓因)과 환웅(桓雄)은 부자관계이지만, 그들의 역할과 존재위치는 어떻게 구별 되는가? 그 다음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이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에서 곰과 범의 토템동물은 원시사회-선사시대에서 어느 문화에 속한 것인가? 이들이 동물에서 인간화를 원하는 과정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그리고 熊女者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여자가 된 곰은 더불어 혼인할 자가 없으므로 매번 단수 아래에서 잉태케 해달라고 빌었다)에서 여인의 적극적인 결혼의지와 모권적(母權的)인 분위기를 감지케 하는 것은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환웅은 잠시[사람으로]변하여 그와 혼인하니)로 이어지면서 모계가 부계(父系)로 옮겨지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토템종교 사회에서 인간중심으로 발전되는 과정 그리고 여인 중심의 모권적인 사회가 얼마 동안 지속되다가 부권사회로 옮겨져 일부일처제의 가정을 형성하는 배경을 말하고 있다. 특히 웅녀와 환웅의 결혼과 단군왕검의 탄생은 천손계(天孫系)의 왕조(王朝)를 천명하는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일련의 원시-선사시대의 발전과정은 어떤 문화사적인 배경에서 형성되었으며, 그런 선사시대를 어떻게 추적해 낼 수 있을까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여기에 단군설화 본문 해석의 방법론적인 기술이 요청된다. 첫째로 어의분석(Semantische Analyse)이고, 둘째로 문학적-전승사적(傳承史的)인 비평방법이요, 마지막으로 동기와 전통비평(動機와 傳統批評)이다. 이런 방법론을 적용하여 위에 언급된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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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의론적 분석(semantische Analyse,語意論的 分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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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위에서 단군설화의 시대적인 배경을 문제 삼고, 설화본문을 역사적-문화사적인 맥락으로 거슬러 올라가 가장 가깝게 일치하는 의미를 모색하는 해석 작업을 제안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단군설화 본문을 역사적-문학적 또는 문자적으로 해석한 연구서를 많이 접했고, 계속해서 접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반 한문(漢文)의 사전적인 어의(語意)와 색인사전의 용례(用例)로 만족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군설화 본문에서 특이한 어문적-어휘적인 조형(造形)을 본다. 이를테면, 석유, 서자, 삼위태백, 환웅천왕, 단군왕검 등인데, 이들은 일반 부사용법, 일반명사(석유, 서자)로만 이해하기에는 간단하지 않은 것 같다. 고유지명(삼위태백)은 하나의 지명인지, 두 개의 지명의 결합인지 지리상의 사실로는 낯선 것이다. 그리고 고대 또는 선사시대의 배경에서 환웅천왕과 단군왕검은 통치자의 칭호로서 “왕(王 )을 가지고 있다. 인류는 어느 시대부터 왕(王 ) 칭호를 사용했던 것인가? 이런 어휘들의 어의는 지금까지 별로 크게 문제되지 않고 그냥 포괄적인(총론적인) 의미로 넘겨져 왔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 구문상의 단어들이 특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있다면, 그들은 해석 작업에서 어휘(단어)의 의미 분광(독일어로 Das Bedeutungsspektrum), 즉 단군설화 본문의 동시대 상황과 작품들을 신중하게 끌어들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어휘에 대해서 동시대적(同(共)時代的,synchrone Betrachtung)인 고찰이 요청된다. 그러나 우리는 단군설화가 문서로 작성 된 이후 전승(傳承) 단계에서 다양한 여러시대의 손을 거친 것은 아닌가 의심하면서 연대기적인 고찰(diachrone Betrachtung)에 머물러 단군설화 본문의 시초 또는 그 설화의 직접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있지 않은가를 성찰(省察)할 필요가 있겠다. 단군설화 본문의 어휘들이 사실상 확정된 또는 임시적인 의미의 지식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어의적인 분석은 아직도 본문의 내용의 구명(究明)을 전할 수 없다. 어의분석은 그 결과가 온전히 나올 때까지 반복해서 검토되고, 재검사로써 증명되고, 교정되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부정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다의적(多意的)인 어휘 가운데서 적합한 의미를 찾아보려고 의미분광(Das Bedeutungsspektrum, 意味分光) 방법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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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설화 고기(古記) 첫머리는 석유환인으로 시작한다. ㅁ옛날에 환인...구하였다ㅁ에서 昔에 대해서 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어 한문(漢文)과 갑골상형 문자 측면에서 논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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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昔) : 고기에 의하면 ㅁ석유(昔有), 시유(時有)ㅁ라는 부사적인 표현은 “옛날에, 당시에 ... 있었다”로 해석된다. 예를 들면, 時有六書(당시에 육서가 있었다.) 고래(古來)는 옛날 이래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단군설화 고기(古記) 첫머리에 ㅁ석유(昔有)ㅁ를 단순히 “옛날에 ... 있었다” 로 해석했고 아무런 문제가 없이 넘어갔었다.

 

:그러나 단군신화의 배경이 신석기 시대 앙소와 용산문화 또는 홍산문화였다면, 그런 시대에 사용되었던 문자(文字)는 어떤 것이며, 그런 문자는 무슨 뜻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물을 수 있다. 단군설화가 기원후 13세기 고려 일연에 의해 최종 편집되어 전승된 설화이지만, 기원전 2333년 단군왕국이 건설되었다면, 설화의 시대는 선사시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의 역사적인 문화와 연결된다면, 은상대(殷商代)에는 갑골상형문(甲骨象形文)이 사용되었으며, 설화 본문의 한문(周代의 金文,秦代의 小篆, 宋代의 楷書의 사용)은 적어도 갑골문의 원의(原意)에 따라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한문(漢文)의 표기를 갑골문의 어원을 찾아 해석할 수 있는 한,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한문 안에 숨겨진 갑골상형문자의 진의(眞意)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은상대의 갑골문은 은허 지구에 묻혀 있다가 1899년에야 발굴되어 현재 갑골문 연구는 100년 안팎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장애가 되는 것은 단군설화의 본문을 한문과 함께 그의 구체적인 역사배경과 관계없이, 설화가 최종편집 되었던 저자시대에 국한해서 보려는 데 있다. 그러나 필자는 단군설화의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실제적으로 인정하여, 중국의 문헌에 따라 고조선 시대와 동시대가 되는 문화사적인 배경, 즉 앙소/용산문화와 홍산문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설화가 간직한 문학의 본문을 분석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군왕검과 요(堯) 임금이 기원전 24세기의 인물이라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앙소문화 후반과 용산문화 시기의 특징을 문헌에 따라 구별해 보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그 시대와 가장 가깝던 문자 갑골상형문(대체로 기원전 16 세기경 사용)에 따라 갑골문 언어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를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설화 본문 고기의 첫머리에 부사적인 용법 석유(昔有)를 해석하는 문제이다. 갑골문의 ㅁ석 昔ㅁ는 그림이 아닌 상형(象形)이다. 3줄기의 물결이 태양 위에 또는 그 아래 있다. 중국인 엽옥삼(葉玉森)은 석의 윗부분 災의 고자(古字), 아래부분 일(日)과의 결합형태를 보고 홍수(洪水)가 난 날이라는 뜻을 취하여, 석(昔)자로 해석했다. 허진웅은 “商 나라 사람은 홍수의 지닌날을 석 昔으로 표시하였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 참고할만한 자료는 陳煒愖 저, 『甲骨文導論』,이규갑외 공역, 2002년, 학고방, 139-140,가로와 세로의 3겹 물결형상은 홍수재난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재난으로 인신(引伸)되었다. 이런 3겹 물결과 그의 위 아래에 위치한 태양 모양을 결합한 상현문 昔은 홍수재난의 의미를 나타내는 지난 과거를 이야기 한다.

 

:그 밖에 바빌론 세계창조 모형을 보면, 둥근 원형의 상반부는 3층의 하늘 대양이 있고, 맨 아래 지름부분에는 하늘대양 아래 위치한 태양이 동에서 서로 운행하는 그림이 나온다. 문자로 표현하면, 갑골문 昔의 형상과 일치하는 3겹 물결 아래 태양의 위치와 동일하다. 고대 바빌론인의 창조세계와 중국의 홍수재난의 형상이 동일한 것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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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자(庶子) 해석 문제 :

 

:단군설화 고기를 보면, 昔有桓因 庶子桓雄에서 ㅁ서자 庶子ㅁ는 적자 옆에 첩의 아들이거나 나라의 벼슬, 직함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갑골문에서 庶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아직도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어떤 개연성이 있는 해석이 흥미롭다. 손예철은 갑골문의 유화(類化)현상에서 庶의 분석과정을 지적하는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허신이라는 중국 갑골문 학자가 庶자의 자형에 대해서, 爲古文光字라고 하면서 庶를 光으로 해석했던 일이다. 그러나 高 明 편, 『고문자류편』, 398쪽을 보면, 손예철의 비평적인 지적이 맞는다. 허신의 해석은 오류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 서자(庶子)는 사전적으로 적어도 3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금문상용자전(金文常用字典)』에 따르면, 서자는 1. 갑골문자로 서(庶)는 음식을 익혀먹는 불에 달군 조약돌을 말한다, 2. 고유지명으로서 서(庶)란 곳이 있다, 3. 관직(官職)으로 서자부가 있다. 주나라 시대 천자가 설치했던 고위직이다. 행정 관료를 임명하였다. 윤리도덕 교육을 관장하는 직책이다. 부모에게 효도, 형제들의 우애를 돈독히 하며, 인도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교육이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단군설화의 고기에 나오는 서자(庶子)는 중국의 하상주(夏商周) 나라 보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또는 동시대적인 문자 갑골문과 관련은 되지만, 금문상용자전의 어휘에 맞추는 것보다는 선사시대 상대(商代)의 인습(因習)에 가까운 의미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상대에는 한 아버지의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없이 한 형제들의 의미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왕위(王位)도 처음에는 형제상속이었다. 단군설화 고기에 부지자의(父知子意),즉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라는 문장에서 서자는 아들로 언급되고 있지 않은가? 환웅은 장자가 아닌 차자(次子)로서 환인 아버지 곁을 떠나 나라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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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왕(王) : 단군설화 고기에 왕 칭호(王稱號)는 환웅천왕(王)과 단군왕검(王儉)에서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왕은 이미 상대(商代)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 중동에서는 기원전 5000년부터 왕국이 건설되어 왕의 통치역사가 있었다. 역사적인 시기 이전부터 왕(王) 칭호는 정치-종교적인 지도자에게 붙여졌던 칭호이다.

 

: 고대 국가와 현대 국가개념과 좀 규모가 작은 도시국가와 부족연맹체의 지도자가 왕으로 불러졌다(예. 이스라엘 사사시대에 부족연맹에 세겜도시의 왕 아비멜렉 왕). 아마도 고대 고조선 환웅도 이런 의미에서 제사장 왕으로 칭호를 받은 3000명 무리의 지도자였을 것이다. 특히 환인에게 받은 천부인 3개(거울, 칼과 모자 관(冠) 중 환웅이 머리에 쓴 관(冠)은 갑골상형문자의 “왕” (갑골문)을 의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모자는 삼각형 모형과 깃털로 장식한 모자에 대해서는 최남선(崔南善, 「단군고기잔석」, 『단군신화연구』(이은봉 편),온누리, 1986,p.24를 보라)이 이미 말한 바이다.

 

:역사적으로 일찍이 기원전 3000년 초기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는 고등문명을 이룩했던 신정국가인데, 그의 왕은 설형문자로 군왕표시를 갑골상형문자 왕( 王 )과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한문(漢文)보다 먼저 있던 갑골상형문자를 통해서 동시대적인 관점(同時代的 觀點)으로 단군설화의 왕(王)칭호를 볼 수 있겠다.

 

:하여간 한문화(漢文化) 된 단군설화 본문을 선사시대 배경 아래서 갑골문의 어의를 찾아 좀더 시간을 가지고 연구 조사하면, 지금까지의 이해했던 것이 전혀 다르게 해석될 가능성이 있으며, 상상과 추측으로 해석했던 것이 실증적으로 설득력 있게 그리고 과학적으로 해명될 날이 올 것이라 기대된다.

 

:홍산문화(紅山文化) 유적에서 발굴된 채색도기에 새겨진 부호문자나 그 시대와 관계된 갑골문과 같은 문자를 구체적으로 탐구하여 고고학적인 유물과 문학을 병행해서 문서내용을 해석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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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삼위태백(三危太伯) : 삼위(三危)는 고유명사 지명(地名) 또는 추상명사로서 3가지 위험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삼위는 중국 서쪽 변방 돈황 남쪽 산 이름으로 나온다(書經,淮南子). 산둘레 100리로 鳥鼠山이다(山海經). 융인(戎人)이 말하는 세 봉우리의 산을 말한다(尙書). 현재는 ㅁ감숙(甘肅)ㅁ 지역 어딘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는 태백과 결합되어 있다. 지역적으로 중국과 한반도에 걸쳐 있는 광활한 영토이다.

 

:아직 국가영토적인 개념 보다는 인간 거주공간을 말하는 것 같다. 구약 창세기 8:4-21에서 홍수 후에 노아는 아르메니아 아라랏 산 정상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리는 이야기와 비교 된다. 대홍수를 피해 높은 산으로 올라와 제사를 드리는 종교행위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 추측에 따르면 다른 한편 삼위는 태백 고유지명을 수식하는 형용사가 되어 3가지 위험과 재난들, 즉 홍수, 화재와 전쟁(역병)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런 대재난이 반복되는 위험 속에 있는 태백 높은 산을 말 할 수 도 있다.

 

:고대 선사시대의 중국 중원의 황하문명 지역의 대 홍수재난과 북만주 난하, 대릉하와 요하 강 유역에 발생하는 홍수재난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해마다 거듭되는 셀 수 없이 많던 홍수로 인하여 국가는 수도를 여러 번 옮겨야 할 정도였다. 역사적으로 상(商)은 홍수로 인하여 13번이나 천도했던 적이 있었다. 요나라 시대에는 홍수가 중국 전토에 범람하기도 했다. 따라서 홍수재난을 전후해서 높은 지대로 사람을 구출하는 지도자들의 치산치수(治山治水)의 세상통치를 ㅁ석유(昔有)-서자(庶子)-삼위(三危)ㅁ라는 어휘의 병렬에서 감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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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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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설화 본문에서 '환웅은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 그는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을 맡아서 관장하고, 세상에 머물러 다스리며 교화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문장을 분석해 보면, 환웅은 무리(또는鬼), 3익(三翼), 5부(五部)와 세상인(백성, 百姓)을 거느리고 다스린다. 3000명의 무리는 어떤 부류들인가? 풍백, 우사와 운사는 누구인가? 그리고 5부의 행정(行政)은 누가 맡는가? 백성들은 얼마나 되며 어디에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환웅천왕의 왕권을 위해서 대답되어야 할 것이다. 천왕(天王)은 3000명 무리,3익과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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