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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문명과 고조선 역사의 문명사적 고찰(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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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문명과 고조선 역사의 문명사적 고찰(考察)

 

-단군사화(史話) 본문의 역사비평적 해석-

 

방석종(方錫淙)

前 감리교 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목 차

 

I. 서설

 

II. 문제제기와 방법론

 

1. 어의론적 분석: 석유(昔有), 서자(庶子), 삼위(三危),

환웅천왕(桓雄天王),단군왕검(檀君王儉)의 王 칭호,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 환인의 품성과 행위

2. 석유환인-삼위태백-홍익인간의 구문적 분석

3. 대홍수 재난 문학의 평행(Parallel)

4. 양식사적 비평과 삶의 자리

5. 결과

 

III. 단군설화 본문의 문화사적인 고찰

 

고조선의 홍산문화(紅山文化)와 중국의 앙소/용산문화

1. 곰과 호랑이 토템과 앙소문화

2. 웅녀의 결혼과 용산문화

 

IV. 고조선의 영토사적인 고찰

 

1. 고조선 영토전승의 문제

2. 요하문명 대(對) 황하문명의 역사적인 관계

3. 단군왕조 전통의 문제

4. 환인 상제신과 하은주의 천사상(天思想)

 

V. 종합적 고찰(綜合的 考察)

 

 

I. 서설

 

필자는 단군설화(사화) 연구를 위해 일차적으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史)에 실려 있는 고조선(古朝鮮) 역사 본문을 가지고 그의 시대와 문명을 폭넓게 보고 단군사화 본문을 개별적으로 주석하려고 한다. 문화사적으로 단군사화는 그의 연대 기원전 2333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사시대(先史時代)또는 원시시대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단군사화는 이런 시대적인 배경과 연결되어 본문(本文)이 주석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단군사화는 그의 역사적인 자료와 증거물이 충분치 못한 가운데 몇몇 사서(史書)의 인용(위서, 고기, 당배구전, 통전 등)으로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역사서는 후대의 편찬 된 내용들이라, 단군사화 본문의 내용과는 거리가 멀리 있는 후대의 창작물이라는 의심도 받는다. 특히 역사적으로는 전설시대(傳說時代)라는 틀에서 기록을 보아야하기 때문에 환인 상제신 옆에, 환웅(桓雄)과 웅녀(熊女)라는 인물은 역사적으로 말하기는 불가하지만, 수렵과 농경사회, 씨족사회의 형성은 신석기(新石器) 시대와 청동기 시대로 이행되었던 인류문명의 발전단계와 원시국가(原始國家) 성립과정을 반영(反映) 하고 있다.

일찍이 중국은 전설시대의 하왕조(기원전 2050-1550년 추정)나 상왕조(기원전 1800-1100년 추정)를 상서,시경, 죽서기년, 사기 등에 기록해 놓았다. 이런 전설시대는 중원과 황하를 중심했던 선사시대의 앙소문화(기원전 5000-3000년 또는 5000-2500년)와 용산문화(기원전 2800-2000년 또는 2300년-1800년 추정)를 근거로 했던 시대로 정리해 놓았다. 중국의 하은상(夏殷商)나라는 공통적으로 용산문화(龍山文化) 이후(以後)에 등장하였다.

그렇다면 단군왕조는 중국의 용산문화 기간에 건국되었던 국가이었다. 그는 중국의 고대 전설국가 보다 근 300년 먼저 세워졌던 역사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고조선은 문명사적으로 홍산문화(紅山文化,기원전 4000년-2000년)라는 독립된 문화를 발전시켰다. 우하량 문화(기원전 3500년 추정)도 발견되었다. 고조선 성립은 하가점 하층문화(기원전 2500년-1500년) 기간이었다. 고조선 문화는 현재까지 주로 고고학적인 출토물들 예를 들면, 고조선 복식, 채색 질그릇(적,백,황,흑색),비파형 동검, 세형동검과 석곽묘, 고인돌 등의 높은 수준의 예술 조형물 연구에 집중되어 있을 뿐이요, 그의 시대적인 상황이나 정치적인 현상이 중국의 역사기록물만큼 준비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단군사화 본문에 나타난 정치사회상들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고조선의 홍산문화 틀 속에 우하량(牛河梁)의 여신(女神) 종교와 하가점 하층문화(또는 豊下文化) 기간의 고조선 건국을 받아드리면서도, 중국의 앙소문화와 용산문화에 나타난 원시사회 성립과 발전과정들을 전제로해서 단군사화의 본문을 주석할 것이다.

 

 

II. 문제제기와 방법론(問題提起와 方法論)

 

중국 앙소와 용산 양 원시-선사문화와 독립적으로 비슷한 시대에 난하/대릉하와 요하 유역을 중심해서 발전 되었던 홍산문화 틀 속에 우하량 문화(기원전 3500년경)와 하가점 하층 문화 (기원전 2500-1500년)는 단군 고조선 국가를 형성케 했다(기원전 2333년경). 시대적으로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요(堯)임금과 동시대적이었다. 이것은 위서(魏書)의 내용이다.

그런데 고기(古記)에는 그보다 더 오래된 환웅시대를 ㅁ석유 昔有 옛날ㅁ에라는 설화문 도입구로 시작하고 있다. 이런 문구는 계속해서 서자환웅 수의천하(數意千下) 탐구인세 하시삼위태백(貪求人世 下視三危太伯) 가이홍익인간(可以弘益人間)이라는 4자 또는 6자 성어(成語)로 서술되고 있다.

문제는 옛날은 어느 때 어떤 시기였는가? 삼위태백은 위치가 어디였는가? 환웅이 인간을 위해서 홍익인간을 갈망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상황에서 환웅은 인간을 위해 지대가 높은 산들을 찾았는가? 환인(桓因)과 환웅(桓雄)은 부자관계이지만, 그들의 역할과 존재위치는 어떻게 구별 되는가? 그 다음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이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에서 곰과 범의 토템동물은 원시사회-선사시대에서 어느 문화에 속한 것인가? 이들이 동물에서 인간화를 원하는 과정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그리고 熊女者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여자가 된 곰은 더불어 혼인할 자가 없으므로 매번 단수 아래에서 잉태케 해달라고 빌었다)에서 여인의 적극적인 결혼의지와 모권적(母權的)인 분위기를 감지케 하는 것은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환웅은 잠시[사람으로]변하여 그와 혼인하니)로 이어지면서 모계가 부계(父系)로 옮겨지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토템종교 사회에서 인간중심으로 발전되는 과정 그리고 여인 중심의 모권적인 사회가 얼마 동안 지속되다가 부권사회로 옮겨져 일부일처제의 가정을 형성하는 배경을 말하고 있다. 특히 웅녀와 환웅의 결혼과 단군왕검의 탄생은 천손계(天孫系)의 왕조(王朝)를 천명하는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일련의 원시-선사시대의 발전과정은 어떤 문화사적인 배경에서 형성되었으며, 그런 선사시대를 어떻게 추적해 낼 수 있을까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여기에 단군설화 본문 해석의 방법론적인 기술이 요청된다. 첫째로 어의분석(Semantische Analyse)이고, 둘째로 문학적-전승사적(傳承史的)인 비평방법이요, 마지막으로 동기와 전통비평(動機와 傳統批評)이다. 이런 방법론을 적용하여 위에 언급된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1. 어의론적 분석(semantische Analyse,語意論的 分析)

 

필자는 위에서 단군설화의 시대적인 배경을 문제 삼고, 설화본문을 역사적-문화사적인 맥락으로 거슬러 올라가 가장 가깝게 일치하는 의미를 모색하는 해석 작업을 제안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단군설화 본문을 역사적-문학적 또는 문자적으로 해석한 연구서를 많이 접했고, 계속해서 접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반 한문(漢文)의 사전적인 어의(語意)와 색인사전의 용례(用例)로 만족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군설화 본문에서 특이한 어문적-어휘적인 조형(造形)을 본다. 이를테면, 석유, 서자, 삼위태백, 환웅천왕, 단군왕검 등인데, 이들은 일반 부사용법, 일반명사(석유, 서자)로만 이해하기에는 간단하지 않은 것 같다. 고유지명(삼위태백)은 하나의 지명인지, 두 개의 지명의 결합인지 지리상의 사실로는 낯선 것이다. 그리고 고대 또는 선사시대의 배경에서 환웅천왕과 단군왕검은 통치자의 칭호로서 “왕(王 )을 가지고 있다. 인류는 어느 시대부터 왕(王 ) 칭호를 사용했던 것인가? 이런 어휘들의 어의는 지금까지 별로 크게 문제되지 않고 그냥 포괄적인(총론적인) 의미로 넘겨져 왔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 구문상의 단어들이 특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있다면, 그들은 해석 작업에서 어휘(단어)의 의미 분광(독일어로 Das Bedeutungsspektrum), 즉 단군설화 본문의 동시대 상황과 작품들을 신중하게 끌어들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어휘에 대해서 동시대적(同(共)時代的,synchrone Betrachtung)인 고찰이 요청된다. 그러나 우리는 단군설화가 문서로 작성 된 이후 전승(傳承) 단계에서 다양한 여러시대의 손을 거친 것은 아닌가 의심하면서 연대기적인 고찰(diachrone Betrachtung)에 머물러 단군설화 본문의 시초 또는 그 설화의 직접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있지 않은가를 성찰(省察)할 필요가 있겠다. 단군설화 본문의 어휘들이 사실상 확정된 또는 임시적인 의미의 지식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어의적인 분석은 아직도 본문의 내용의 구명(究明)을 전할 수 없다. 어의분석은 그 결과가 온전히 나올 때까지 반복해서 검토되고, 재검사로써 증명되고, 교정되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부정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다의적(多意的)인 어휘 가운데서 적합한 의미를 찾아보려고 의미분광(Das Bedeutungsspektrum, 意味分光) 방법을 사용한다.

 

단군설화 고기(古記) 첫머리는 석유환인으로 시작한다. '옛날에 환인...구하였다'에서 昔에 대해서 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어 한문(漢文)과 갑골상형 문자 측면에서 논하고자 한다.

 

1) 석(昔) : 고기에 의하면 ㅁ석유(昔有), 시유(時有)ㅁ라는 부사적인 표현은 “옛날에, 당시에 ... 있었다”로 해석된다. 예를 들면, 時有六書(당시에 육서가 있었다.) 고래(古來)는 옛날 이래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단군설화 고기(古記) 첫머리에 ㅁ석유(昔有)ㅁ를 단순히 '옛날에 ... 있었다'로 해석했고 아무런 문제가 없이 넘어갔었다.

그러나 단군신화의 배경이 신석기 시대 앙소와 용산문화 또는 홍산문화였다면, 그런 시대에 사용되었던 문자(文字)는 어떤 것이며, 그런 문자는 무슨 뜻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물을 수 있다. 단군설화가 기원후 13세기 고려 일연에 의해 최종 편집되어 전승된 설화이지만, 기원전 2333년 단군왕국이 건설되었다면, 설화의 시대는 선사시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의 역사적인 문화와 연결된다면, 은상대(殷商代)에는 갑골상형문(甲骨象形文)이 사용되었으며, 설화 본문의 한문(周代의 金文,秦代의 小篆, 宋代의 楷書의 사용)은 적어도 갑골문의 원의(原意)에 따라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한문(漢文)의 표기를 갑골문의 어원을 찾아 해석할 수 있는 한,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한문 안에 숨겨진 갑골상형문자의 진의(眞意)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은상대의 갑골문은 은허 지구에 묻혀 있다가 1899년에야 발굴되어 현재 갑골문 연구는 100년 안팎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장애가 되는 것은 단군설화의 본문을 한문과 함께 그의 구체적인 역사배경과 관계없이, 설화가 최종편집 되었던 저자시대에 국한해서 보려는 데 있다. 그러나 필자는 단군설화의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실제적으로 인정하여, 중국의 문헌에 따라 고조선 시대와 동시대가 되는 문화사적인 배경, 즉 앙소/용산문화와 홍산문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설화가 간직한 문학의 본문을 분석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군왕검과 요(堯) 임금이 기원전 24세기의 인물이라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앙소문화 후반과 용산문화 시기의 특징을 문헌에 따라 구별해 보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그 시대와 가장 가깝던 문자 갑골상형문(대체로 기원전 16 세기경 사용)에 따라 갑골문 언어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를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설화 본문 고기의 첫머리에 부사적인 용법 석유(昔有)를 해석하는 문제이다. 갑골문의 ㅁ석 昔ㅁ은 그림이 아닌 상형(象形)이다. 3줄기의 물결이 태양 위에 또는 그 아래 있다. 중국인 엽옥삼(葉玉森)은 석의 윗부분 災의 고자(古字), 아래부분 일(日)과의 결합형태를 보고 홍수(洪水)가 난 날이라는 뜻을 취하여, 석(昔)자로 해석했다. 허진웅은 '商 나라 사람은 홍수의 지닌날을 석 昔으로 표시하였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 참고할만한 자료는 陳煒愖 저, 『甲骨文導論』,이규갑외 공역, 2002년, 학고방, 139-140,가로와 세로의 3겹 물결형상은 홍수재난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재난으로 인신(引伸)되었다. 이런 3겹 물결과 그의 위 아래에 위치한 태양 모양을 결합한 상현문 昔은 홍수재난의 의미를 나타내는 지난 과거를 이야기 한다.

그 밖에 바빌론 세계창조 모형을 보면, 둥근 원형의 상반부는 3층의 하늘 대양이 있고, 맨 아래 지름부분에는 하늘대양 아래 위치한 태양이 동에서 서로 운행하는 그림이 나온다. 문자로 표현하면, 갑골문 昔의 형상과 일치하는 3겹 물결 아래 태양의 위치와 동일하다. 고대 바빌론인의 창조세계와 중국의 홍수재난의 형상이 동일한 것이 흥미롭다.

 

2) 서자(庶子) 해석 문제 :

단군설화 고기를 보면, 昔有桓因 庶子桓雄에서 ㅁ서자 庶子ㅁ는 적자 옆에 첩의 아들이거나 나라의 벼슬, 직함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갑골문에서 庶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아직도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어떤 개연성이 있는 해석이 흥미롭다. 손예철은 갑골문의 유화(類化)현상에서 庶의 분석과정을 지적하는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허신이라는 중국 갑골문 학자가 庶자의 자형에 대해서, 爲古文光字라고 하면서 庶를 光으로 해석했던 일이다. 그러나 高 明 편, 『고문자류편』, 398쪽을 보면, 손예철의 비평적인 지적이 맞는다. 허신의 해석은 오류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서자(庶子)는 사전적으로 적어도 3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금문상용자전(金文常用字典)』에 따르면, 서자는 1. 갑골문자로 서(庶)는 음식을 익혀먹는 불에 달군 조약돌을 말한다, 2. 고유지명으로서 서(庶)란 곳이 있다, 3. 관직(官職)으로 서자부가 있다. 주나라 시대 천자가 설치했던 고위직이다. 행정 관료를 임명하였다. 윤리도덕 교육을 관장하는 직책이다. 부모에게 효도, 형제들의 우애를 돈독히 하며, 인도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교육이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단군설화의 고기에 나오는 서자(庶子)는 중국의 하상주(夏商周) 나라 보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또는 동시대적인 문자 갑골문과 관련은 되지만, 금문상용자전의 어휘에 맞추는 것보다는 선사시대 상대(商代)의 인습(因習)에 가까운 의미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상대에는 한 아버지의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없이 한 형제들의 의미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왕위(王位)도 처음에는 형제상속이었다. 단군설화 고기에 부지자의(父知子意),즉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라는 문장에서 서자는 아들로 언급되고 있지 않은가? 환웅은 장자가 아닌 차자(次子)로서 환인 아버지 곁을 떠나 나라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3) 왕(王) : 단군설화 고기에 왕 칭호(王稱號)는 환웅천왕(王)과 단군왕검(王儉)에서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왕은 이미 상대(商代)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 중동에서는 기원전 5000년부터 왕국이 건설되어 왕의 통치역사가 있었다. 역사적인 시기 이전부터 왕(王) 칭호는 정치-종교적인 지도자에게 붙여졌던 칭호이다.

고대 국가와 현대 국가개념과 좀 규모가 작은 도시국가와 부족연맹체의 지도자가 왕으로 불러졌다(예. 이스라엘 사사시대에 부족연맹에 세겜도시의 왕 아비멜렉 왕). 아마도 고대 고조선 환웅도 이런 의미에서 제사장 왕으로 칭호를 받은 3000명 무리의 지도자였을 것이다. 특히 환인에게 받은 천부인 3개(거울, 칼과 모자 관(冠) 중 환웅이 머리에 쓴 관(冠)은 갑골상형문자의 “왕” (갑골문)을 의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모자는 삼각형 모형과 깃털로 장식한 모자에 대해서는 최남선(崔南善, 「단군고기잔석」, 『단군신화연구』(이은봉 편),온누리, 1986,p.24를 보라)이 이미 말한 바이다.

역사적으로 일찍이 기원전 3000년 초기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는 고등문명을 이룩했던 신정국가인데, 그의 왕은 설형문자로 군왕표시를 갑골상형문자 왕( 王 )과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한문(漢文)보다 먼저 있던 갑골상형문자를 통해서 동시대적인 관점(同時代的 觀點)으로 단군설화의 왕(王)칭호를 볼 수 있겠다.

하여간 한문화(漢文化) 된 단군설화 본문을 선사시대 배경 아래서 갑골문의 어의를 찾아 좀더 시간을 가지고 연구 조사하면, 지금까지의 이해했던 것이 전혀 다르게 해석될 가능성이 있으며, 상상과 추측으로 해석했던 것이 실증적으로 설득력 있게 그리고 과학적으로 해명될 날이 올 것이라 기대된다.

홍산문화(紅山文化) 유적에서 발굴된 채색도기에 새겨진 부호문자나 그 시대와 관계된 갑골문과 같은 문자를 구체적으로 탐구하여 고고학적인 유물과 문학을 병행해서 문서내용을 해석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4) 삼위태백(三危太伯) : 삼위(三危)는 고유명사 지명(地名) 또는 추상명사로서 3가지 위험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삼위는 중국 서쪽 변방 돈황 남쪽 산 이름으로 나온다(書經,淮南子). 산둘레 100리로 鳥鼠山이다(山海經). 융인(戎人)이 말하는 세 봉우리의 산을 말한다(尙書). 현재는 ㅁ감숙(甘肅)ㅁ 지역 어딘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는 태백과 결합되어 있다. 지역적으로 중국과 한반도에 걸쳐 있는 광활한 영토이다.

아직 국가영토적인 개념 보다는 인간 거주공간을 말하는 것 같다. 구약 창세기 8:4-21에서 홍수 후에 노아는 아르메니아 아라랏 산 정상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리는 이야기와 비교 된다. 대홍수를 피해 높은 산으로 올라와 제사를 드리는 종교행위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 추측에 따르면 다른 한편 삼위는 태백 고유지명을 수식하는 형용사가 되어 3가지 위험과 재난들, 즉 홍수, 화재와 전쟁(역병)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런 대재난이 반복되는 위험 속에 있는 태백 높은 산을 말 할 수 도 있다.

고대 선사시대의 중국 중원의 황하문명 지역의 대 홍수재난과 북만주 난하, 대릉하와 요하 강 유역에 발생하는 홍수재난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해마다 거듭되는 셀 수 없이 많던 홍수로 인하여 국가는 수도를 여러 번 옮겨야 할 정도였다. 역사적으로 상(商)은 홍수로 인하여 13번이나 천도했던 적이 있었다. 요나라 시대에는 홍수가 중국 전토에 범람하기도 했다. 따라서 홍수재난을 전후해서 높은 지대로 사람을 구출하는 지도자들의 치산치수(治山治水)의 세상통치를 ㅁ석유(昔有)-서자(庶子)-삼위(三危)ㅁ라는 어휘의 병렬에서 감지할 수 있다.

 

5)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단군설화 본문에서 '환웅은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 그는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을 맡아서 관장하고, 세상에 머물러 다스리며 교화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문장을 분석해 보면, 환웅은 무리(또는鬼), 3익(三翼), 5부(五部)와 세상인(백성, 百姓)을 거느리고 다스린다. 3000명의 무리는 어떤 부류들인가? 풍백, 우사와 운사는 누구인가? 그리고 5부의 행정(行政)은 누가 맡는가? 백성들은 얼마나 되며 어디에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환웅천왕의 왕권을 위해서 대답되어야 할 것이다. 천왕(天王)은 3000명 무리,3익과 백성통치에서 그의 왕권(王權)을 천명하고 있다. 태백산 정상과 신시(神市)는 그의 영토의 중심지로 정해졌다. 그의 아버지 환인 상제신이 주신 땅이다. 그리고 그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이미 살고 있었다. 이럼으로써 1.환웅천왕의 왕권, 2. 땅, 통치 영역, 3.백성이 왕국존재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증명한다. 그러나 문제는 3000명과 “풍백, 우사, 운사” 3익은 어떤 존재들인가? 그들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그의 정치적-종교적 또는 사회적인 배경이 궁금하다. 환웅천왕은 제정일치 신정국가(神政國家)의 최고 지도자이라면, 왕 주변에 측근들과 국가적 직무를 담당하는 계층이 준비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최우선은 국가 산업과 방위(防衛)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이미 국가들이 출현했던 역사를 익숙하게 알고 있다. 이미 기원전 3000년경부터 고대 왕국이 형성되고 왕이 전쟁을 통해 노예제도와 경제사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우리는 그런 의미의 왕(갑골 상형문자 ,王)을 알고 있다. 이런 왕의 측근에는 귀족과 전쟁을 위한 군대(軍隊)와 장군들이 직제(職制)를 맡았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풍백,우사와 운사를 문자적(文字的)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런 3 가지 칭호가 종교적인 신적인 존재로 해석도 되겠지만, 다른 한편 환웅천왕의 나라를 위해 3 칭호는 정치적인 직제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논할 필요가 있다. 우선 역사적인 자료를 가지고 3 가지 칭호와 비교되는 배경을 찾아내는 일이다. 단군설화가 기원전 2333년 전후 중국 요순우 시대와 하은주(夏殷周) 시대와 밀접한 역사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전제(前提)에서 문제를 풀어 보겠다.

은(殷) 시대에 왕권 아래 부자후백(婦子候伯) 등 근친 귀족이 있어 왕을 보좌했던 역사가 있다. 중국 상서(尙書),반경편(盤庚篇)에는 百執事가 나오고, 西周의 大盂鼎에는 殷正百辟이라고 했는 데 백관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예기와 곡례에는 六大와 오관(五官)이 나온다. 정현(鄭玄)은 주(注)에서 이것을 은제(殷制)라고 했다. 특히 풍백에서 백(伯)은 그 뒤에 나오는 우사,운사(雨師,雲師)와 구별되는 관직 같으나 . 여기서 사(師)는 백(伯)과 군대를 지휘하는 관직 같다. 그리고 오관(五官)도 주곡주, 명주, 병주, 형주, 선악 5가지 관장 업무와 비교 된다고 하겠다.

그럼 무리 3000명과 풍백, 우사, 운사(군사령관들)의 관계를 살펴 보자. 군대편제에서 10진을 주요 단위로 삼은 단위가 있었다(기층단위 10명 소대, 차례로 100,500,1000,3000...). 주나라가 상을 멸망시켰던 때는 1사(一師)가 5000명이었다. 상대(商代) 군대편제는 복사(卜辭)에서 등부호삼천(登婦 好三千)이란 기록이 있다. 비교적 큰 제후국에서는 군사가 3000 이상이었다. 복사에는 또 [왕께서 삼사(三師)를 만드시니, 우중좌(右中左)이다. 왕작 삼사 우중좌(王作 三師 右中左).

단군설화에서 환웅천왕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을 맡은 일은 은나라의 은제(殷制)에 나오는 백과 사(伯과 師)의 칭호를 가진 3 명의 군사령관과 비교되며, 왕이 전시(戰時)에 출동시키는 3000명의 병력 그리고 평상시 백성을 관장하는 5부(部)는 하와 은 나라의 5 관(官)과 비교된다. 누가 누구에게 이런 관직을 전해 주었는가하는 문제는 현재로서 밝히기는 어렵지만, 기원전 2000년 전후 왕검조선과 중국의 하은주는 요하 유역과 황하 유역에서 서로 교류하면서 공통된 국가제도의 관직을 설정한 것만은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서로의 국가 영토가 어떻게 경계 지어져 있었는지의 문제보다는 갑골문자로 기록된 복사의 내용으로 전승된 정치사회와 종교의 내용들이 크게 관심을 끌고 있다. 문서 전승이 매우 부족한 단군설화 배경 연구는 아마도 그와 가깝거나 동시대의 역사와 비교를 통해서 단군설화 내용의 역사성을 설득력 있게 증명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단군설화는 결코 왜곡된 문서나 후대의 상상이 추가된 부가물(附加物)이 아닐 것이다. 고대의 미미한 것을 과장한 것이 아니라, 실재 있었던 것을 그대로 복원하여 그의 위상(位相)을 밝히는 작업일 것이다.

부설(附說: Exkurs): 상대인(商代人)의 갑골복사에 나타난 상제(上帝)는 창조영역에서 해, 달, 별, 바람, 구름, 벼락과 천동 그리고 비를 제사(帝使),제신(帝臣)으로 부린다. 그리고 그는 특히 바람, 구름, 벼락과 비를 농산물 수확, 가뭄과 풍요로 관장한다. 이런 창조 영역의 징조들은 신격화 되어 기능적인 신(機能神)으로 해석 된다. 이들은 신석기 시대 농경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농산물의 풍요 또는 재앙의 세력(Ambivalenz : 동일한 대상에 대한 반대 감정의 양립(병존) )으로 신성시 되었다. 일차적으로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신격화 하여 풍신(風神),우신(雨神),운신(雲神)으로 해석한 작업이 있다. 이은봉은 1) 운신(雲神)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요점만 취해 보면, 구름은 은(殷) 나라에서 화(禍)를 가져오는 영수(靈獸) 용(龍)의 형태로서 신성한 신의 뜻이며, 신위(神威)를 나타낸다고 했다. 2) 우신(雨神)은 장마와 홍수 재난과 화(禍)를 가져오는 위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3) 풍신(風神)은 상제의 직접적인 사자 역을 담당하고, 자유자제로 사방 각지를 다니며, 상제의 명령을 전달한다. 상제의 대리자로서 사정관(司政官) 역할을 수행한다. 상제의 의지를 전한다. 이은봉은 이런 3 신의 기능을 매우 유익하고 가치 있게 해설하고 있다. 3 신 기능의 공통점은 각자 위력을 가지고 구원의 역할을 하지만, 적수에게는 禍를 가져온다. 그리고 상제신의 의지를 전하며, 그의 직접적인 사정관(사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은봉은 환웅이 이런 신들을 부리고 있다는 데에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상제신이 부리는 3 신들을 환인(단군설화에서 최고 신)이 아닌 인간 환웅천왕이 부린다는 것은 무언가 혼동(混同)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와 비슷한 논조는 이강식에게서도 나타난다(이강식, 「3神 5帝 思想에서 형성한 고조선과 고구려의 3韓 5加 組織의 구조와 기능」,2005년,12,『단군학 연구』 제 13호,248.250.252 참조: 이강식은 천신교 교리체계에서 “환인천제에게서 땅에 내려와 등극함으로써 환웅천왕은 천제(天帝)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환인과 환웅의 본질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단군설화에서는 풍신(風神) 대신 風伯이며, 우신(雨神) 대신 雨師이고, 운신(雲神) 대신 雲師가 등장한다. 즉 신(神)이 아니라 백(伯) 또는 사(師)라는 사실이다.이에 대해서 이강식(상게서,250.252)은 신시에 3伯 5事 조직을 언급하고 있다. 백(伯)과 사(師)의 칭호를 백(伯)으로 통합시키고 있다. 3과 5라는 구조는 생각해 볼 수 있으나, 3 백의 기능이 무엇인지는 말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천신교 종교 테두리 안에서 제사집행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필자는 제사보다는 정치-군사적인 기능에 역점을 두고 설명하겠다. 그럼 이런 칭호 앞에 수식어 또는 복합어(風, 雨, 雲)는 무엇을 의미하려는 것일까? 이런 신적인 명사(名詞)들은 백(伯)은 하상대에 왕의 근친 귀족이기도 하다)과 사(師)라는 관직의 권위와 신성한 임무를 나타내려는 것이 아닐까? 그래야 그들은 환웅천왕의 신하가 되고, 환웅천왕은 상제신 같은 최고의 통치자로서 그의 신하들을 기능신들처럼 부릴 수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런 3 기능신들은 3 신하들로서 인간 통치자를 모시는 왕의 의지를 전하고(風 伯), 그의 적수들을 공격하여 패배케 하는 군사령관 기능(雨師, 雲師)을 수행하여 화(禍)를 보내는 동시에 자기들을 위해 구원과 승리를 보내는 사자(使者)가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환웅천왕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렸다는 문장이 국가 방어와 전쟁에 대비하는 군사 3000명과 3인 군사령관의 등장을 표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와 비슷한 정황은 이미 상대(商代)를 반영하는 역사와 가깝다. 따라서 단군설화는 신화와 신(神)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상대(夏商代)와 동시대적인 단군왕국과 백성 그리고 군사령관의 임무를 신적인 위력과 권위로써 서술하는 역사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런 인물들을 신화적으로 신성시하는 고대인의 서술방법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환인 상제신(桓因 上帝神)과 환웅(桓雄)의 재해석(再解釋)

 

이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겠으나, 고기(古記)에서 말하는 환인과 서자(庶子) 환웅,환웅이 거느리는 풍백,우사,운사의 신적인 존재들은 신 자체(神者體)가 아니다. 그들은 신(神)과의 관계에서 불러지는 신적인 칭호(稱號)들이며, 거룩한 인격(人格)이며, 신에게 맡겨진 인간존재이다. 따라서 어느 때는 ㅁ하느님(지존자)의 아들들ㅁ로서, 어느 때는 ㅁ사람이나,고관(高官)들ㅁ로서 불러지는 존재이다(시편 82:6-7 참조). 그들은 신들의 회의(會議)에서 하느님과 대화하고,의논하는 자리에 있지만, 심판도 받고,죽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현재 단군신화의 환웅과 단군의 존재는 신존재로 신격화 내지 신인화(神人化)된 존재로 혼동되고 있다. 고대 천상회의에서 유일신 하느님은 3인의 측근을 두고, 예언자나 사사들(士師,군장(軍將)들로 불리운다)을 불러 아들이라 부르며,지상(地上)의 일을 맡겼다. 이런 맥락에서 환웅과 단군 그리고 풍백,우사와 운사가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이에 대해서 방석종저, 『신화와 역사』,「단군신화의 천상어전 회의와 소명설화」,2006년,7-13쪽 : 삿 6; 왕상 22:19-21;사 1:18-20; 렘 23:18;시 82:1-2.6-7 등 참조). 환인 상제신은 지상과 떨어져 있는 보이지 않는 천상에 격절(隔絶)되 있는 것 같지만, 그는 환웅과 의논하고, 세상을 내려다 보고, 인간을 이롭게 하며, 아들에게 천부인(天符印) 3 개를 주어 소명(召命)을 맡기는 분이다. 이런 환인(桓因)의 신적인 행위는 환웅의 위력에서 계속 현현된다. 환웅이 3000명과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게 했다. 고로 환웅의 세상통치는 환인의 명령이지, 환웅 자신의 권위와 독자적인 힘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단군설화에서 환인이 환웅에게 맡기는 신적인 행위를 부지부식 간에 환웅의 것으로 전담(全擔)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런 국민적인 의식이 바로 최고 통치자로 하여금 성역(聖域)의 일인자(一人者)가 되게 하는 죄(罪)된 역사를 낳게 한다. 신(神)의 일을 인간(人間)의 일로 바꾸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적(神的)인 일을 차단시키는 것이다. 결코 환인 상제신은 ㅁ격절신(隔絶神)ㅁ이 아니다. 그는 환웅의 통치에서 계속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는 환웅과 “의논하고, 세상을 관심하고,인간사를 구원하며,인간을 아들로 불러, 그의 힘을 맡기는”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는 신(神)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단군신화에서 환인 상제신의 품성(稟性)과 행위(行爲)를 몰라보고,인간 환웅만 쳐다보고 있었다.단군설화(신화) 연구가들은 환인의 본질문제에만 급급했지, 설화 본문(本文)에 서술된 환인의 품성에 대한 구체적(具體的)인 문자적(文字的)인 해석에는 등한(等閑)했다 : 환인의 아버지됨, 세상을 내려다 봄, 인간의 구원, 신적인 의무를 허락함에 대해서 보다 풍부한 이해를 촉진해야 할 것이다.

 

2. 석유환인(昔有桓因),삼위태백(三危太伯),홍익인간(弘益人間)의 어의와 문구분석 문제

 

대홍수 재난(大洪水 災難)과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관계성에 대한 재해석(再解釋)

 

단군설화 본문 : 고기운(古記云)

 

'대 홍수 재난이 있던 때 환인의 서자 환웅이 수차례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탐하여 구하니(昔有桓因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父知子意), 삼위태백아래를 내려다보니(下視三危太伯)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함이라(可以弘益人間),이에 아들에게 천부인 3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乃授天符印三個 遺往理之)환웅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雄率徒三千),태백산 마루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降於太伯山頂,神壇樹下)이곳을 신시라 이르고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불렀다(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위의 본문은 고기(古記) 첫머리에 나오는 ㅁ천상계(天上界)ㅁ의 정황이다. 석유(昔有)는 일반적으로 ㅁ옛날로ㅁ불러지는데 그와 연결된 환인이 신이라면, 석(昔)은 단순한 ㅁ지난날ㅁ로 해석될 수 없다. 어떤 사건(事件)이 있던 과거의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에 대한 연결된 상황은 하시삼위태백(下視三危太伯)에서 삼위태백(三危太伯)의 높은 지대는 홍수의 대재난의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지대로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弘益人間)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昔有桓因, 三危太伯, 弘益人間 이 세 개의 어휘들과 문구(文句)는 동일한 정황과 그에 대한 대처행위를 암시한다. 인간의 생활을 위협하는 재난과 위기 그리고 그를 극복 해결하는 구제행위에 간섭하는 신적神的)인 영역을 추상(推想)할 수 있다. 특히 [옛날]로 읽어 왔던 석유는 문자적으로 갑골문자(甲骨文字)의 기원을 갖는다면, 昔은 商代의 사람들이 홍수의 재난의 개념을 가졌던 지난날이 된다. 이런 대홍수의 재난의 기억은 각 민족의 공통적인 것이요, 그들의 창세신화의 요소를 이룬다.

이와 문학적으로 평행(平行)되는 것은 중국 문헌에도 나온다. 상서의 반경편, 굴만리(屈萬里,상서(尙書), 107-108; 당란(唐蘭),1973; 7-8에 보면 “천도하기 전후에 상왕 반경은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은나라에 크나큰 재난이 내리니(홍수), 선왕께서는 마음속으로 불안하게 여기셨다. 이에 일어나 백성의 이익(利益)을 살펴 천도하기에 이르렀다(殷降大虐, 先王不懷, 厥修作, 視民利用遷).“ 그리고 계속해서 '옛날 나의 선왕께서 아주 많은 공적을 쌓으셨으니 그분들은 모두 지대가 높은 곳으로 옮기셨다(古我先王 , 將多于前功, 適于山)'는 기록이 있다.

전체적인 문학적인 구성이 내용적으로는 차원(次元)이 다르지만, 민족의 대재난 홍수사건을 당한 지도자들이 백성의 세계의 관심을 두고 실제로 간섭하면서 그들을 높은 지대로 인도하여 도와서 구하였다는 내용은 공통적이다. 단군설화(檀君說話), 또는 단군사화(壇君史話)는 신적(神的)인 영역에서 환인 상제신(桓因 上帝神)과 그의 아들 환웅천왕의 대화와 동의의 과정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었다면, 중국상서 굴만리의 기록에는 자연재난을 당한 선왕이 백성을 도와서 이익을 살펴 안전한 높은 지대로 옮겼다는 정치적인 공적을 진술하고 있다. 전자는 신학적-종교적 제정일치(祭政一致)의 면이 지배적이라면, 후자는 세속적-정치적인 측면이 두드러지고 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단군설화는 고유명사와 고유지명을 상술한 데 비해서, 상서(尙書)는 은(殷) 나라 외에 고유지명의 구체적인 표현이 없다.

이상을 정리하자면, 단군설화에서는 환웅시대의 홍수 재난을 말한다면, 중국 상서 굴만리는 은대(殷代)의 홍수재난을 말하고 있다. 시대적으로 환웅천왕은 늦어도 용산문화 이전(기원전 2300년-1800년) 시기인데, 은나라는 용산문화(龍山文化)의 기원(紀元)을 가진 후대의 시대(기원전 1800년-1100년)에 속한다. 그리고 문자적-문학적으로 갑골문자(甲骨文字)의 기원을 보이는 ”석유(昔有)“가 홍수재난을 의미하는 상대(商代)의 표시라면, 그것은 그 시대와 가까웠던 요임금(堯) 때(기원전 2300년경)의 홍수재난을 기억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단군설화에서 대홍수의 재난은 단군왕검(檀君王儉,기원전 2333년) 이전 환웅천왕의 시기로 올라간다. 즉 요임금 이전 더 오래 되었던 대홍수시기를 기억하는 과거의 대홍수 재난이 단군설화 고기(古記) 벽두에 나오는 ㅁ석유ㅁ(昔有)로 표현된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문학사적으로 그것이 고대의 구전적(口傳的)이든 전승된 기억(記億)이든 단군설화의 대홍수 재난을 시초로 환웅천왕이 인간을 대홍수의 위험에서 구원할 높은 지대의 산들을 내려다보고 인간세상을 사랑하며 관심을 보여 도와주고 인간(人間)을 구원한 지도자라면, 은 나라의 선왕은 민(民 )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나타난다.

시대적으로 홍익인간 시대 이후 에 오는 ㅁ민리(民利)시대ㅁ라 할 수 있다. 좌우간 시대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고조선 족이 중국의 족속 보다는 국가를 먼저 세우고 문명을 일으켜 후대의 중국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만은 사실로 드러났다. 갑골문자원형 ”석(昔 ,홍수의 재난)“과 함께 역사가 시작 된 나라는 인간 위에 환인 최고의 절대신의 존재를 주인으로 모시고 출발했음을 명시(明示)하고 있다.

부록(附錄) : 단(壇)과 요(堯)는 고대 중동 바빌론의 유프라테스 강 유역 ㅁ지쿠랏트ㅁ(Zikkurat,인공으로 쌓아 올린 흙 언덕 산 위의 신의 제단 성(城) ) 신전(神殿)의 제단과 공통점이 있는 흙을 쌓아 올렸던 형태와 일치된다. 홍수의 재난(災難)을 대비하여 신을 향하여 만든 제단이다. 다만 요(堯)는 제단 보다는 민을 위한 농토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흙으로 쌓은 뚝(제방)만을 의미하는 것 같다.

삼위태백(三危太伯)에 관하여 : 『서경』과 『회남자』에 의하면, 삼위는 중국 서쪽 변방 돈황 남쪽 산 이름이다. 『산해경『에는 삼위산은 조서산 서쪽을 가리킨다. 그리고 『상서(尙書)』는 융인(戎人)이 말하는 3 봉우리 산을 언급하고 있다. 제왕운기의 註와 승람 권 42는 구월산, 아사달에 삼위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삼위는 고유지명(固有地名)으로서 돈황 남쪽이고, 융인이 아는 3 봉우리 산이라면, 이 산은 현 ㅁ감숙(甘肅)ㅁ지역이다. 즉 내몽고 자치 지구와 신강 자치구 중간 지역 어딘가 있다. 그리고 태백은 아사달 또는 묘향산이라면, 한반도 지역이다. 만주지역을 벗어난 40도/95도 선상과 천산산맥 아래에 있는 중국 서북쪽의 지역에서 한반도 지역에 미치는 광활한 지역을 살펴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삼위는 중국지역에 있는 산의 고유지명이고, 태백은 한반도에 있는 산의 고유지명이다. 멀리 떨어진 두 개의 다른 지역이 결합된 것은 영토사적인 관점에서 오랜 역사 기간을 지나면서 고대전승과 후대전승이 문헌적인 근거를 가지고 어느 시점에서 고정(固定)된 편찬 작업을 보여주는 것 같다. 확실한 것은 후대 태백이라는 지명이 한반도(韓半島) 묘향산에 일치 한다면, 중국과 만주에서 한반도로 이동했던 역사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위에 인용된 『위서(魏書)』에 기재된 아사달과 동일한 한반도내의 지역에 일치한다. 따라서 『위서』의 편찬연대에 가까운 시대에서 『고기(古記)』의 편찬을 생각해 볼 수 있다.

 

3. 대홍수 재난과 홍익인간에 관한 문학적인 평행(文學的 平行) :

 

1)단군설화에 나타난 문장양식

 

고조선 시초: 昔有桓因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遺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 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대 재난이 있던 때 환인의 서자 환웅이 수차례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려고 탐하니,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 아래를 내려다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함이라,이에 아들에게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으니, 환웅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이곳을 신시라 부르고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불렀다.'

 

2)중국 상서(尙書) 반경편(盤庚篇)에 나타난 문장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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